[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국내 경제를 대표하는 기업 삼성전자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각 지역에 인공지능 거점을 구축하는 한편 관련 인재를 확충했으며 올해에는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 계획까지 발표했다. 미중 무역전쟁 등에 따른 대내외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비하기 위함이자 이재용 부회장을 향하는 수사 당국의 칼날을 맞아 정상경영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삼성 내부에서 나온 위기론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유럽과 북미, 중국, 일본을 누비며 광폭행보를 거듭했다. 각 지역에 인공지능 거점을 마련하는 한편 인재를 확보해 하드웨어의 삼성전자에서 융복합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체질개선을 꾀했다는 평가다. 나아가 통신 네트워크 및 장비, 부품 등에 있어 전통의 파트너들과 협력을 다지는 한편 새로운 가능성 타진에도 나섰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이 부회장은 연 초부터 살인적인 강행군을 불사하며 내외부의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는 평가다. 당장 이 부회장은 1월 2일 오전 사내 시무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신년회에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참석했다. 이어 3일에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아 5G 네트워크 통신 장비 생산라인 가동식에 참석하고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이 부회장은 가동식 현장에서 고동진 IM부문 대표이사 사장, 노희찬 경영지원실장 사장, 전경훈 네트워크사업부장 부사장 등 경영진과 네트워크사업부 임직원들에게 “새롭게 열리는 5G 시장에서 도전자의 자세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4일에는 반도체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을 찾아 DS부문 및 디스플레이 경영진과 간담회를 갖고 사업 전략을 논의했으며 간담회에는 김기남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 진교영 메모리사업부장 사장, 정은승 파운드리사업부장 사장, 강인엽 시스템LSI사업부장 사장,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부회장의 글로벌 행보도 계속됐다. 지난 5월 15일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 양대 통신사 NTT도코모와 KDDI 본사를 방문했으며 이 자리에서 5G 서비스의 조기 안착과 상호 협력을 다지는 한편 최근 오픈한 쇼케이스인 갤럭시 하라주쿠를 찾아 임직원을 격려했다.    

▲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중국 선전을 찾았다. 출처=웨이보

이 부회장의 행보를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키워드는 ‘위기’로 좁혀진다. 실제로 메모리 반도체 수퍼 사이클이 종료되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반토막이 났고, 갤럭시 신화로 대표되는 스마트폰 경쟁력도 최근 아슬아슬한 1위를 지키는 수준이다. 이 마저도 중국의 화웨이 및 비보, 오포, 샤오미 등에 위협당하고 있다. 5G와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약간의 실수라도 저지르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이 부회장을 움직이고 있다는 평가다.

이러한 위기감은 최근 이 부회장의 사내 행보로도 잘 드러난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6월에만 1일, 13일 두 차례 DS부문 경영진과 회동했다.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전략인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 후 투자 집행 계획을 직접 챙기는 한편 최근 경기둔화 우려에 따른 반도체 사업의 리스크 대응 체계를 재점검했다는 후문이다.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은 지난 4월 발표됐으며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133조원을 투자해 시장 1위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14일에는 더 생생한 메시지가 나왔다. 고동진 IM부문장 사장, 노희찬 경영지원실장 사장, 노태문 무선사업부 개발실장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 부회장은 “지금은 어느 기업도 1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며 “그 동안의 성과를 수성(守城)하는 차원을 넘어 새롭게 창업한다는 각오로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흔들리고 있는 IM부문의 경쟁력을 다잡는 한편 5G 이후의 6G 이동통신, 블록체인, 인공지능 전략을 구상하면서 그 기저에 강력한 위기론을 전제한 셈이다.

▲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라인이 보인다. 출처=삼성전자

돌아보면, 언제나 위기였다
이 부회장이 말하는 ‘위기’는 ‘비상상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삼성전자의 역사를 보면, 위기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는 원동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 이병철 창업주는 1974년 적자 투성이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위기 극복'을 키워드로 삼은 바 있다. 단순 제조업 포트폴리오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첨단 제조업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논리다. 일본을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 트렌드가 빠르게 자리잡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 전형적인 공식이다. 이는 1983년 동경선언으로 이어진다.

이건희 회장도 마찬가지다. 이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역사적인 신경영에 나설 때 '위기'를 직시해야 '기회'가 보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위기론도 같은 맥락이라는 평가다. 메모리 반도체 수퍼 사이클이 종료된 후 글로벌 스마트폰 전략이 지지부진한 상태라는 위기를 직시하고, 시스템 반도체 및 인공지능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며 새로운 기회를 찾겠다는 전략이다.

이 부회장 중심의 삼성전자 위기론이 '반등'을 노리는 특유의 전략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에서, 일각에서는 최근의 위기론이 이 부회장을 향하는 수사당국의 칼 날을 피하려는 정무적 선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가 심각해지며 그룹 수뇌부를 향한 수사 당국의 압박에 대비해 정상경영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는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