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태호 기자] 성수기 진입에도 싱가포르 정제마진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 셰일오일 공급과잉, 석유수출국기구(OPEC) 감산지속 등의 역학관계가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어 당분간 정제마진 회복이 더딜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이다. 정유업계가 IMO(국제해사기구) 규제 시행 효과로 인한 정제마진 상승을 기대하는 이유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5월 넷째 주 싱가포르 정제마진은 배럴 당 2.8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정유업 성수기에 진입했지만 여전히 손익분기점으로 평가받는 4.5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미-중 무역분쟁 본격화로 미국과 중국의 경제 성장이 둔화 압박을 받고 있어 세계 원유 소비량이 축소되는 분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영국 정유업체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조사에 따르면, 미-중 양국의 원유소비량은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2017년 기준 미국의 원유 소비량은 세계 소비량의 20.2%를 차지했고, 중국은 13.0%를 기록했다.

미-중 원유 소비 축소로 공급량이 상대적으로 늘어나 공급-소비 불균형이 촉발되고 있는 셈이다. 미 에너지청(EIA)이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부터 세계 석유제품 소비량이 생산량 대비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난해 4분기 생산량은 소비량보다 일일 171만 배럴 더 많았다. 5년래 최고치다.

▲ 세계 원유 소비량-생산량 추이. 출처=EIA

원유 수요 감소에도 미국 셰일오일 생산량은 오히려 증가했다. EIA에 따르면 미국의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평균 원유생산량은 일일 1188만 배럴로 직전년도 동기에 비해 일일 173만 배럴 늘어났다.

미 원유 생산 증가는 셰일오일 채굴 기술 발달에 힘입었다. EIA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인 셰일오일 생산지인 오클라호마 애너다코(Anadarko) 지역의 올해 1~4월 시추기 당 원유 평균 생산량은 일일 398배럴로 지난 2015년보다 무려 63%나 증가했다.

셰일오일 최대 생산지 중 하나인 텍사스 퍼미안(permian) 분지의 올해 1~4월 시추기 당 원유 평균 생산량도 일일 607배럴로 지난 2015년 대비 105%나 뛰었다.

채산성이 늘다보니 셰일오일 손익분기점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인 미국 라이스타드(Rystad)에 따르면 미국 셰일오일 채굴 프로젝트 40%가 생산 유지 기준 WTI 가격을 배럴 당 45달러로 보고있다.

손익분기점이 낮아지다보니 미 셰일오일 업체들은 유가에 상대적으로 둔감하게 됐고, 이것이 곧 생산량 증가로 이어질 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유사 가동률은 대체로 9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생산량 증가는 곧 원유재고 증가와 이어진다. EIA에 따르면 미국의 5월 다섯째 주 원유재고는 680만 배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84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봤던 시장 컨센서스와 정 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제마진은 결국 수요와 공급 곡선으로 결정된다”라며 “무역분쟁에 따른 세계 경제 둔화로 수요는 감소하고 있는 반면, 현재 셰일오일 같은 경질원유 공급은 많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싱가포르 정제시설 풍경. 사진=엑손모빌

WTI 대비 더딘 두바이유 하락, 아시아 정제마진 회복 '압박'

미국의 셰일오일 공급과잉 영향으로 재고가 늘어나다보니 WTI 가격은 급락하고 있다. 그러나 두바이유 가격은 상대적으로 덜 하락하고 있다.

두바이유는 셰일오일 기술발전 같은 가격하락 동인은 없고, 오히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일일 120만배럴 감산과 이란 제재 강화 등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위기 증가와 같은 가격 상승 요인만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OPEC과 비OPEC은 유가 하락 우려로 감산 연장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메리츠투자증권에 따르면 5월 다섯째 주 두바이-WTI 스프레드는 배럴 당 10.8달러를 기록했다. 황 함유량이 더 높아 품질이 비교적 낮은 것으로 여겨졌던 두바이유 가격이 오히려 더욱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스프레드 증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두드러졌고, 상반기에는 오히려 두바이유가 WTI보다 더 저렴했다.

여기에 한국 정유사의 실제 정제마진은 싱가포르 마진에서 두바이 기준유가-실제판매가격 차이(OSP)를 빼야 한다. 즉, 실질 기준으로는 더 낮은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정유사는 주로 두바이유를 구매하는데, OPEC의 감산 효과가 중동에 집중되고 있다보니 중동 원유를 구매할 때 적용되는 OSP가 많이 상승해 정제마진이 더욱 안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사우디 라이트 원유 OSP는 5월 1.4달러에서 6월 2.1달러, 7월 2.7달러로 2개월 연속 급등했다”라며 “7월 중에는 마이너스(-)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미-중 무역분쟁으로 중국이 미국 원유 대신 두바이유 수입을 늘리고 있다는 점도 스프레드 확대에 영향을 줬다.

중국 관세청에 따르면, 중국의 올해 1~4월 미국 원유 수입량은 56만3674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89.8% 감소했다. 대신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UAE)의 올해 1월~4월 수입량은 3051만5300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45.7%나 증가했다.

▲ 중국 원유수입량 변화 추이. 출처=중국 관세청

원민석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중국의 미국산 원유 수입은 0(Zero)%에 가까워졌고, 대신 중국은 사우디/UAE 등 중동산 원유 수입을 늘렸다”라며 “이 영향으로 중동산 원유 가격이 미국산 원유 대비 고가를 형성해 아시아 정유사들의 수익성은 크게 악화됐다”라고 분석했다.

특히 셰일오일은 유황 함유량이 적어 정제과정에서 휘발유 등의 고품질 제품이 더 많이 생산되다보니, 셰일오일 공급과잉이 휘발유 등 경질유 마진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WTI의 탄소비중(API)은 통상 약 40도로 유황이 0.24% 함유돼 있으며, 두바이유의 API는 31도로 유황 함유량이 2%에 이른다고 평가되고 있다.

신한금융투자에 따르면, 세계 휘발유 마진은 지난해 1분기에서 3분기 평균 배럴 당 12달러를 기록했지만,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1분기에는 배럴 당 4달러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파라자일렌(PX) 제조공장 증설 등으로 석유제품 공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어 싱가포르 정제마진 하락 압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원유 정제 과정에서 PX 원료인 나프타만 별도로 생성할 수 없으므로, 결국 나프타 생산 증가는 휘발유, 경유 등의 석유제품 공급도 늘리게 되는 셈이다.

▲ 세계 PX 실질 생산증분. 출처=한국기업평가

때문에 중국 업체들은 가동률을 낮추는 모양새다. IBK투자증권에 따르면 6월 둘째 주 중국 국영석유공사(NOC)와 티팟 가동률은 각각 76.3%, 58.5%를 기록했다. 특히 티팟 가동률이 감소해 올해 1분기 평균 가동률 대비 6.5%포인트 줄었다.

정리하자면,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원유 소비 감소와 셰일오일 채굴 기술의 발달로 인한 WTI 공급 증가, 그리고 두바이유의 가격 하락을 더디게 하는 각종 요인들로 인해 아시아 정제마진은 상승은 더뎌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무역분쟁 지속으로 세계 원유 소비가 줄어 수급 불일치 상황이 지속되는 중에 중국의 PX시설 증설로 공급이 더욱 늘어나다보니 정제마진 회복이 안 되고 있다”라며 “경질유 생산 비중이 높은 셰일오일의 공급과잉도 정제마진에 하락 압박에 영향을 주고 있다”라고 밝혔다.

업계 “정제마진 회복 당분간 어려워… IMO 수혜 기대하는 중”

원유 공급-수요 불균형은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정유업계는 정제마진 회복이 단기간에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IMO 2020’을 기다리는 이유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오는 2020년 1월 1일부터 선박유의 황 함유량을 현행 3.5%에서 0.5%로 의무적으로 낮출 것을 주문했다. 즉, 규제 이후 해운업체는 벙커C유와 같은 중유 대신 경유 등으로 선박을 운행해야 하는 것이다.

▲ 매연을 내뿜으며 항해하고 있는 선박. 사진= Mr Nai / Shutterstock

즉, IMO규제가 시행되면 경유 판매량이 늘어나게 된다. 수요 증가는 가격 상승과 이어지며 이는 곧 석유제품 정제마진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정유업계 실적이 자연히 늘어날 수 있게 되는 이유다.

서석원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사장은 지난 5월 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저유황유 수요가 올해 3~4분기부터 늘어날 것이 사실상 확정된 분위기”라며 “IMO2020 시행에 앞서 일부 대형 선사들 중심으로 수요에 대한 공급계약이 이미 체결되고 있어 수요 호재가 하반기 정제마진 회복에 일조할 것이라 본다”라고 말했다.

이도연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IMO의 영향이 3분기부터 시작해 4분기에 본격화 될 전망”이라며 “IMO 황 규제의 저유황 원유 수요 증가분 등을 감안하면 4분기에서 늦어도 2020년에는 두바이유 가격이 WTI 저렴해지며 아시아 및 국내 정유사의 원가경쟁력은 강화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한국 정유 4사는 IMO 규제 시행을 자연스레 대비하고 있는 모양새다. IMO를 위해 투자를 늘린 것은 아니지만,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휘발유·경유 등의 고도화제품 생산비율을 높이다보니 IMO 규제도 준비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에쓰오일은 지난해 4조8000억원을 투자한 잔사유 고도화설비(RUC)와 올레핀 다운스트림 콤플렉스(ODC) 건설을 마치고 현재 상업가동을 하고 있다.

RUC를 통해 원유 찌꺼기를 휘발유·경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바꿀 수 있다. RUC 가동으로 에쓰오일의 고도화비율은 기존 22.7%에서 33.7%로 크게 늘어났다.

GS칼텍스는 현재 일일 27만4000만의 고도화설비를 갖췄다. 한국 정유사 중 최대 규모다. 고도화비율은 약 34.3%에 이른다.

▲ GS칼텍스 정제시설. 사진=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도 총 4000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잔사유 분해시설인 아스팔텐제거공정(SDA) 시설 건설을 완료하며 고도화설비 능력을 일일 21만1000배럴로 높였다. 현대오일뱅크의 고도화율은 40.6%로 국내 최고 수준이다.

SK에너지는 IMO 규제 대비를 위해 약 1조원을 들여 울산에 감압잔사유탈황설비(VRDS)를 건설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 가동 예정이며, 시설이 완공되면 일 4만 배럴 규모의 경질유 및 저유황유를 추가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현재 SK에너지의 고도화율은 23.7%다.

업계 관계자는 “IMO 시행이 고부가가치 제품 판매를 이끌 수 있기 때문에 호재는 맞다”라며 “다만, 이를 달리 보면 오히려 중유 등 저부가가치 제품의 사용용도가 제한되는 측면이 있으므로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