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 세령(19.9%) 〈 ‘미혼’ 상민(35.8%)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위치한 대상그룹 본사 전경.


‘청정원’으로 유명한 대상가(家)에 경영권 승계 ‘퍼즐’이 서서히 맞춰지는 느낌이다.
그룹 총수인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과 부인인 박현주 부회장이 첫째딸이 아닌 둘째딸에게 지분을 몰아주고 나선 이유에서다.

장외거래 통해 57억원 규모 250만주 양도

임 회장 부부는 지난 2일 장외거래를 통해 대상그룹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의 지분 6.73%(총 250만주)를 차녀 상민(29) 씨에게 양도했다.

주당 가격은 2290원으로 총 57억원 규모. 이전부터 29.07%(1079만2630주)의 지분을 가지며 대상홀딩스 최대주주였던 상민 씨는 이로써 지분율을 35.80%(1329만2630주)까지 키우며 차기 경영권 승계자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됐다.

2대 주주인 첫째딸 세령(32) 씨의 지분은 19.90%로 상민 씨와의 격차는 15.9%p까지 벌어진 상태.
이처럼 얼마 전 이혼한 후 본격적인 대상그룹의 후계구도 경쟁에 뛰어들 것이라는 관측을 낳았던 세령(32) 씨를 뒤로하고 미혼인 차녀에게 지분이 쏠리자 재계에서는 경영권 향방이 사실상 상민 씨로 결정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지분 양도는 경영권 승계를 사실상 상민 씨로 확정지었다는 점에서 임 회장의 속내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무게중심이 상민 씨에게 쏠린 만큼 세령 씨와의 경쟁구도에서 상민 씨가 절대적 우위에 서게 된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임 회장 부부는 슬하에 아들 없이 장녀인 세령 씨와 차녀 상민 씨만을 두고 있다.
지난 2005년 대상홀딩스 중심의 지주회사 체제로 바뀐 이후부터 최대주주인 상민 씨는 꾸준히 지분을 늘려왔다. ‘출가외인’인 세령 씨보다 상민 씨에 지분이 넘겨지는 게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던 것.

그러나 최근 세령 씨가 ‘싱글’ 신분으로 돌아온 직후에도 여전히 상민 씨에게 임 부부의 지분이 이양되자 재계의 관심이 임 회장의 선택 배경에 집중되고 있다.

물론 1949년생인 임 회장이 아직 건재하고 그룹도 전문경영인 체제로 꾸려져 있어 당분간은 경영상 큰 변화는 없을 것이란 게 주변의 시각이다. 실제로 임 회장의 부친인 임대홍 창업주가 1987년 맏아들인 임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한 이후 97년까지 10년간은 오너경영 체제였지만 임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이후 현재까지 10여년간은 철저히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그룹이 운영돼 왔다.

따라서 대상그룹 측은 “어차피 자녀에게 지분을 넘기기로 한 것인 만큼 최근 주가가 하락해 싼 가격으로 주식을 넘긴 것이지 경영권 승계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면서 “식품업계에는 고령의 그룹 총수가 많은 만큼 적어도 15년은 임 회장이 그룹을 지휘할 것”이라고 ‘경영승계설’을 일축했다.

회사 측 “경영권 승계 아니다” 일축

‘경영권 승계는 아니다’는 대상그룹 측의 이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임 회장의 ‘둘째딸 밀어주기’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임 회장은 왜 ‘싱글’로 돌아온 장녀 대신 차녀에게 주식을 넘겼을까. 앞뒤 정황을 따져볼 때 크게 3가지 이유가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우선 경영 실무에 대한 경험 면에서 세령 씨보다는 상민 씨를 우위에 뒀다는 견해다.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세령 씨는 양가 어머니의 소개로 삼성전자의 이재용 전무와 처음 만난 후 1998년 21세의 어린 나이에 이 전무와 결혼했다.

이후 학업도 중단한 채 10여년간 삼성가의 며느리로 살아온 세령 씨여서 경영과는 실질적으로 ‘담’을 쌓아온 생활을 보냈다. 더욱이 경영학을 포기한 채 이 전무와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도 경영학 대신 미술학을 공부했던 세령 씨다.


따라서 임 회장의 선택 이면에는 오랜 기간 ‘주부’의 신분으로 경영권과 거리가 있었던 데다 이혼 후 자녀 양육 문제나 세간의 시선 등을 고려할 때 세령 씨를 외부에 부각시키기엔 다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반면 1980년생인 상민 씨는 철저하게 ‘경영수업’을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뉴욕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지난해 초부터 대상그룹 관계사인 UTC인베스트먼트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대상(주)의 PI본부로 파견 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 사회학과 졸업 후 미국 유학

그러나 대상그룹 관계자는 “PI(Process Innovation)본부는 혁신을 담당하는 부서”라고 소개하면서도 “상민 씨의 활동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상민 씨의 경영참여 여부를 놓고 언론에서도 “무직 상태다”, “일하고 있다”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상민 씨는 미국 유학 중인 지난 2006년 UTC인베스트먼트가 나드리화장품을 인수할 당시 깊이 관여했다는 후문이 있는 등 그룹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실제 대상홀딩스의 공시자료에서도 상민 씨의 직업이 ‘경영인’으로 표기돼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대상 측은 “최대주주이다 보니 경영인이라고 해놓은 듯하다. 무직이라고 써놓을 순 없지 않느냐”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임 회장의 ‘상민 씨로의 선택’에 있어 또 다른 배경은 탄탄한 ‘혼맥’을 자랑하는 대상그룹의 전통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임 회장의 누나인 임경화 씨는 ‘트래펑’으로 유명한 백광산업의 김종의 회장과 결혼했고 동생인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도 한국산업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손필영 전 산은리스 사장의 장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임 회장의 부인인 박 부회장 역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 창업주의 셋째딸로 박삼구 현 회장의 여동생인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대상이 재계에서 그동안 발 넓은 혼맥을 유지해 왔던 점을 감안할 때 임 회장은 미혼인 상민씨에게 지분을 밀어줌으로써 앞으로 그룹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마지막으로 삼성과의 ‘악연’을 끊기 위한 조치로 상민 씨를 부각시킨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종의 ‘삼성의 때’를 벗자는 의미다.

대상은 한때 ‘미원-미풍’의 라이벌 브랜드로 삼성과 조미료 전쟁까지 치르며 성장했다. 1970~80년대 업계 1위를 달리던 ‘미원’에 맞서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제일제당이 ‘미풍’, ‘쇠고기다시다’ 등을 시장에 내놓자 팽팽한 대결구도가 형성됐다.

당시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세상에서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세 가지인데 자식과 골프, 그리고 미원이다”고 했을 정도로 삼성과 대상은 막강한 라이벌 기업이었다.

그러나 지난 1998년 이재용 전무와 세령 씨가 결혼하면서 삼성이 대상의 계열사인 청정원에 투자하는 등 돈독한 사돈관계로 바뀌었다. 하지만 임 회장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되는 과정에서 삼성 측이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이 주변에 알려졌고 서서히 두 기업 간 관계가 악화된 듯싶더니, 지난해부터 삼성측이 청정원 등에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하면서 벌어졌다.

여기에 삼성과 껄끄러운 관계인 한겨레신문사의 자회사 한겨레플러스(초록마을, 한겨레투어, 즐거운학교)를 임 회장의 UTC인베스트먼트가 70억원에 인수하면서 양측 간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이런 가운데 세령 씨가 이혼하게 됐고 삼성가와 ‘결별’한 그를 임 회장이 다시 전면에 내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번 지분양도의 배경에 깔려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향후 임 회장의 시나리오는?

시계의 추를 빨리 돌려볼 때, 두 딸을 둔 임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 이후의 그룹을 어떤 체제로 운영해갈 것인가 역시 대상을 둘러싼 ‘관심거리’다.

우선 두 딸 중 한 명을 ‘총수’로 내세워 ‘1인 체제’로 운영하거나 ‘자매 공동경영’의 그림을 그릴 것으로 보여진다. 전자의 경우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처럼 홀로 그룹 전반을 지휘하는 구도이고, 후자는 보령그룹의 김은선-김은정 자매처럼 둘 중 한 사람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나머지 한 사람이 뒷받침하는 형태다.

이 두 시나리오는 ‘여성 총수 체제’라는 공통점을 갖는데, 대상그룹이 종합식품 회사여서 남성보다는 여성 CEO가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높다.

대상은 ‘미원’을 종합식품 브랜드인 ‘청정원’으로 바꾸며 세계 3대 발효전문기업 및 종합식품회사로 국내외 25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최근 두산그룹으로부터 ‘종가집’ 브랜드를 인수하는 등 장류와 조미료시장에 이어 포장김치 분야까지 진출하며 세를 넓혀가고 있는 것과 연결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오리온그룹의 담철곤 회장과 이화경 사장 부부처럼 남편과 함께 경영하는 ‘부부 경영’의 가능성도 점쳐진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동양가의 ‘사위경영’에 대한 시선도 적지 않다. 임 회장의 처지가 동양가의 고 이양구 옛 동양그룹 회장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옛 동양그룹은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으로 분리되면서 동양은 고 이 회장의 첫째 사위인 현재현 회장이, 오리온그룹은 둘째 사위인 담철곤 회장에게 경영권이 이양됐다.

물론 첫째딸인 이혜경 씨는 가정주부로 지내고 있지만 둘째딸인 이화경 씨는 사장직에 있으면서 왕성한 경영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은 다르다.

김진욱 기자 action@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