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시간을 돌려 2016년 8월 미국으로 갑시다. 당시 고동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이 언팩 무대에 올라 갤럭시노트7을 소개했는데, 훗날 삼성전자에 뼈아픈 고통을 안겨주는 스마트폰과 더불어 크게 관심을 끌었던 것이 바로 고 사장의 복장이었습니다. 흰색 하의에 블루코랄의 산뜻한 자켓을 입었습니다.

 

평소 기자회견 등 먼 발치에서 듣는 고 사장의 목소리는 상당히 굳건하고, 중후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2016년 8월의 고 사장은 복장부터 매우 컬러풀했습니다.

잘 어울리더군요. 고 사장도 이를 의식했는지 본인을 조지 클루니에 비유하는 농담을 해 할리우드 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는 루머입니다. 국내 언론 중 하나는 이를 보도하며 '삼성의 조지 클루니가 떴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지요.

갑자기 왜 고 사장의 복장 이야기냐. 삼성전자 내부에 고 사장의 강력한 패션 라이벌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 고동진 사장이 갤럭시노트7을 소개하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삼성전자는 4일 강남구 도산대로에 위치한 삼성디지털프라자 강남본점에서 미디어데이를 열어 생활가전 사업의 새로운 비전인 프로젝트 프리즘(Project PRISM)과 그 첫번째 신제품인 비스포크(BESPOKE) 냉장고를 공개했습니다.

관련 이미지를 살펴보던 중 비스포크를 설명하던 김현석 삼성전자 생활가전부문 사장의 복장이 시선을 확 잡아 끌었습니다. 2016년 8월의 고 사장에게 옷을 빌려입은 것일까요? 동일한 블루코랄 자켓을 입었습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갔습니다. 2016년 8월의 고 사장의 상의는 블루코랄 자켓이지만 하의는 하얀색으로 매치시켰으나, 김 사장은 상하의 모두 블루코랄로 깔맞춤했습니다. 과격하시군요. 신발은 탐나는 운동화를 신어 더욱 맵시납니다.

▲ 김현석 사장이 비스포크를 소개하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개성의 시대, 내것의 시대
김현석 사장이 보여준 프로젝트 프리즘과 비스포크란 무엇일까요? 김 사장의 복장에 힌트가 있습니다. 바로 개성의 시대, 내것의 시대를 맞아 생활가전의 키워드를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뜻입니다. 냉정히 말하면 이미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세상의 트렌드를 빠르게 따라가면서 시장에 파급력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입니다.

프로젝트 프리즘 자체에 의미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단조로운 백색 광선을 갖가지 색상으로 투영해 내는 프리즘처럼 삼성전자가 밀레니얼 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이 반영된 ‘맞춤형 가전’ 시대를 만들어 가겠다는 뜻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비스포크는 일종의 모듈형 냉장고로 구성됐습니다. 4도어 프리스탠딩(Free Standing, 840~871L), 4도어 키친핏(Kitchen Fit, 605L), 2도어(상냉장ㆍ하냉동, 333L), 1도어 냉장고(380L), 1도어 냉동고(318L), 1도어 김치냉장고(319L), 1도어 변온냉장고(240L), 김치플러스(313L) 등 8개 타입으로 구성되어 취향에 따라 2만2000가지 조합이 가능하다는 설명입니다.

정리하자면 개성의 시대를 맞아 나만의 것을 원하는 트렌드가 강해졌고, 삼성전자는 고객들에게 '당신의 취향에 맞추세요'라며 모듈식 냉장고를 처음 공개한겁니다. 김 시장의 컬러풀하고 개성있는 복장이 시사하는 키워드입니다. 여기에서 김 사장의 취향은 블루코랄 깔맞춤이라는 논리도 성사되기 때문에 다소 놀랍지만, 이 역시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 비스포크가 보인다. 출처=삼성전자

삼성전자의 이러한 움직임은 차세대 소비 주체인 밀레니얼 세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깔렸습니다. 밀레니얼의 트렌드를 읽어 새로운 가전의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행보입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말 생활가전부문 산하에 라이프스타일랩을 신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와 튼튼하고 오래가네'로는 생활가전 시장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절박함도 엿보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삼성전자는 이 분야에서 꽤 오랫동안 노력했습니다. 당장의 기능성을 담보하면서도 디자인적 심미성을 채우려는 셰리프TV, 더프레임 등이 단적인 사례입니다. 특히 더프레임은 QLED TV에 스크린 에브리웨어(Screen Everywhere)라는 개념을 채워 일종의 미학적 가치에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예술을 TV에 채워 개성을 표현하는 것. 이는 넓은 관점에서 프로젝트 프리즘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삼성전자의 노력은 더 세로(The Sero)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더 세로는 세로 방향의 스크린을 기본으로 합니다. 모바일 영상의 경우 대부분 가로가 아닌 세로로 상영되는 가운데, 여기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를 겨냥한 제품이라는 설명입니다. NFC(근거리 무선 통신) 기반의 간편한 미러링(Mirroring) 기능 실행만으로 모바일 기기의 화면과 세로형 스크린을 동기화해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쇼핑, 게임, 동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몰입감 있게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가로로도 시청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용자 경험을 담보하기도 합니다.

김 사장의 '수상한 복장'에 대한 답은 다 나왔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동안 밀레니얼 중심의 트렌드와 행보를 맞췄고, 그 답을 개성과 나만의 시대로 수렴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더 세로와 같은 파격적인 실험이 나오는 한편 레고처럼 냉장고를 맞추는 비스포크라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생활밀착형 생활가전 플랫폼의 진화, 나아가 디자인의 도움으로 완벽한 트렌드 학습에 성공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삼성전자는 비스포크 냉장고의 심미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국내 유명 디자인 스튜디오인 슈퍼픽션(SUPERFICTION)과 협업한 제품도 선보였습니다.

▲ 더 세로 TV가 보인다. 출처=삼성전자

이 아름다운 그림은 성공할까?
삼성전자는 향후 모든 생활가전에 프리즌 브레이크 아니 프로젝트 프리즘의 가치를 담아 비스포크의 방식을 따른다는 방침입니다. 개성 싫어하는 사람도 없고 나만의 냉장고 싫어할 사람 없습니다. 가격도 기존 제품과 비교해 그리 비싸지 않으니, 무조건 성공할까요?

약점을 찾기 어렵지만 모듈식이라는 점 하나에 집중하면 일말의 불안감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자 가전업계에서 모듈식은 거의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구글의 프로젝트 아라, LG전자의 모듈식 스마트폰 LG G5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처음 등장했을때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으나,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다만 업계에서는 비스포크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고 봅니다. 구글 프로젝트 아라는 왜 실패했을까요? 스마트폰을 모듈식으로 조합해 나만의 스마트폰을 만드는 개념 자체는 훌륭했으나 디테일에 약했습니다. 모듈의 호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하드웨어 밸런스가 무너졌습니다. 나아가 지속적인 관리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비스포크는 이러한 약점을 잘 피해갑니다. 우선 모듈방식이고 2만2000개의 조합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 체험할 수 있는 모듈방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유도 측면에서는 약점이지만 냉장고 조합하면서 '실용성'보다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결국 구현할 수 있는 체제는 한정적이고, 이는 세밀한 조합을 해야하는 스마트폰 모듈과는 다른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무리한 서드파티에 따른 생태계 확장은 어려워도, 삼성전자가 직접 제조를 맡는 과정에서 하드웨어 밸런스가 붕괴될 가능성도 낮습니다. 결론적으로 스마트폰이 아니라 냉장고에요. 이것 자체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겁니다.

삼성전자가 모듈식으로 갤럭시 스마트폰을 꾸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을겁니다. 그러나 라이프스타일에 집중한 삼성전자의 신선한 생활가전 실험은 큰 무리가 없다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 사장의 개성넘치는 복장만큼, 삼성전자 생활가전의 산뜻한 행보가 시선을 끄는 이유입니다.

*IT여담은 취재 도중 알게되는 소소한 내용을 편안하게 공유하는 곳입니다. 당장의 기사성보다 주변부, 나름의 의미가 있는 지점에서 독자와 함께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