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광지로도 유명한 아키하바라의 한글 관광안내 시스템.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궁극(窮極)’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떤 일의 과정 혹은 상태의 끝, 이 이상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죠. 그런 의미에서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秋葉原)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 그리고 아이돌 문화 등 서브컬처 콘텐츠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인 세계에서 유일한 ‘궁극’의 공간입니다. 전 세계를 놓고 보더라도 이와 비슷한 사례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기자는 일본 야마구치 현 가라토 시장(唐戶市場)에 이은 ‘해외유통 현장을 가다’의 두 번째 장소 ‘오타쿠의 성지’ 아키하바라에 다녀왔습니다. 유일무이한 독특함으로 아키하바라는 전 세계인들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방문도록 만드는 거대 유통채널이자 최고의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오타쿠의 성지 

▲ 이런 느낌이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아키하바라는 일본 도쿄 치요다구(東京都千代田区)에 위치한 거리의 이름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일본 최대 규모의 가전·전자기기 상점가고요. 그 대형 전자기기 상점들을 주변으로 사이사이의 골목과 건물에 애니메이션 샵, 피규어 샵, 프라모델 샵, 캐릭터 샵, DVD 판매/대여 샵, 게임센터(파칭코...) 등이 아주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건물들의 외관은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들이 크게 그려져 있어 이곳의 정체성을 멀리서도 알 수 있도록 되어있는 곳이 많아요. 아마 일본 만화나 게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사람이 이 거리를 지나면 꼭 한번쯤은 알만한 캐릭터들과 관련된 ‘뭔가’를 마주치게 돼 있습니다.

▲ 기자는 이곳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이곳에 대한 이해도 혹은 감격은 방문자의 ‘덕력’에 비례합니다. 일본 특유의 서브컬처 콘텐츠를 아는 만큼 이 곳에 대한 흥미가 커지죠. 이를테면 이카하바라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싹쓸이 하다시피 하는 곤약젤리와 동전파스 등 일본의 인기상품들을 판매하는 잡화점 돈키호테(ドン·キホーテ)가 있습니다.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은 큰 건물의 2층에서 5층까지 총 4개 층에 있는데요. 단순히 관광을 목적으로 왔다가는 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돈키호테일 뿐이지만 일반인 이상의 덕력을 가진 사람(가령 저라든가,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라든가...)은 이곳의 진가를 건물 8층에서 찾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프로듀스48>로 인지도가 높아진 일본의 인기 여자 아이돌 그룹 ‘AKB48’이 탄생한 라이브 공연 극장이 이 건물 8층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AKB도 아키하바라(Akihabara)의 줄임말이라고 하죠.)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길에는 기자에게 아주 반가운 이들의 사진이 잔뜩 붙어 있습니다.   

▲ 2015년 발매된 AKB48의 48번째 싱글 앨범 '입술에 Be My Baby(唇にBe My Baby)의 자켓 앨범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키타하라 리에, 마츠이 쥬리나, 요코야마 유이, 타카하시 미나미, 사시하라 리노.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 애석하게도 8층 AKB48 극장은 공연이 아니면 개방되지 않아 올라가보지 못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그 외에도 아키하바라에는 기자의 덕력으로도 5분 이상 지켜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주 매니악한 공간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코스프레(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들의 의상을 그대로 따라하는) 샵이나 성인용품 샵 그리고 메이드 카페(일본의 소녀들이 집을 관리해주는 ‘여자 집사’의 복장을 입고 고객의 시중을 들어주는 카페. 메이드들과 신체 접촉은 금지돼 있다.) 등이 있지요. 지극히 일본적인 문화들의 정취가 강한 곳들이기에 아키하바라를 처음 방문한 분들이라면, 꼭 한 번쯤은 들어가서 체험해 볼만한 곳들입니다.     

▲ 오타쿠의 성지는 기자의 부족한 덕력을 비웃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아키하바라, 변화의 아이콘 

일본 도쿄 치요다구(東京都千代田区)에 위치한 아키하바라는 전차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 노선이 ‘무려’ 8개나 겹치는 도쿄 시내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지리 요건으로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지요. 현재의 모습을 보면 이곳은 원래부터 ‘오타쿠’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놀랍게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키하바라 지역에서 나타난 변화의 궤적은 오프라인 유통업 특히 전통시장 활성화 방안의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아키하바라는 일본 전역과 수도인 도쿄 내 교통과 물류의 요지라는 특성 때문에 원래 과일이나 농산물, 야채를 팔던 대형 청과물 시장들이 있던 곳입니다. 실제로 이 시장들은 일본의 경제 성장 속도가 역사상 가장 빨랐던 시기인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운영됐고요.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도 있습니다. 

아키하바라에 대형 전자기기로 유명해진 것은 1980년대부터입니다. 당시는 소니를 필두로 한 일본의 전자기기 업체들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고 엄청난 유동인구에서 비롯된 넘치는 수요로 아키하바라는 청과물 시장에서 순식간에 일본 최대 규모의 전자기기 천국이 됐죠.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렀다면 아키하바라는 지금과 같은 글로벌 인지도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합니다. 아키하바라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서 확산되는 트렌드를 반영하면서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유지해왔습니다. 

▲ JR아키하바라역 앞.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이를테면 90년대 초 일본에서 게임 붐이 일어나자 아키하바라는 일본 최대 게임샵들이 들어섰고요. 90년대 말에는 인기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성공 이후 일본 젊은이들을 뒤흔든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 콘텐츠들을 다루는 곳들이 들어섰습니다. 전통시장에 대해 ‘이곳은 꼭 그래야만 한다’라는 편견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을, 다른 곳과 비교되지 않는 가격이나 종류의 경쟁력 혹은 범접할 수 없는 콘셉트를 반영하고 이와 관련된 상품이나 서비스들을 판매하는 전략으로 계속 변화를 시도하면서 살아남았죠. 이러한 특성은 아카하바라를 ‘일본 유일’이 아닌 ‘세계 유일’의 공간으로 인식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도 아키하바라는 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 일본의 전자제품 전문점 요도바시 카메라 아키하바라점.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정훈 기자

현재 일본 정부는 아직 남아있는 아키하바라의 전자기기 관련 인프라를 활용해 이곳을 IT 분야와 관련된 곳으로 변화를 시키려고 하고 있고요. 이는 여러 가지 부문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오프라인 유통 채널이나 전통시장을 대한 일본의 소비 패턴과 우리나라의 소비 패턴은 확실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일본의 방법이 옳다’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키하바라에 나타난 변화의 사례들은 온라인의 무한 확장 앞에 운영의 위기를 마주한 우리나라의 오프라인 기반 유통 채널이나 전통시장이 한 번 쯤은 연구해 볼 만한 변화의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