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지난해에 쓴 글들을 보고 꽤 놀랐다. ‘나’에 관한 이야기, ‘나’라는 표현을 많이 써서다. 인스타그램을 보니 지난해 3월에는 내가 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구구절절 그동안의 감정을 이유로 댄 글을 썼고, 5월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일기장에나 어울릴 글을 올렸던 거다. 그런 류의 글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일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여가생활에 관한 글도, 평소 감정에 관한 글도 종종 있었지만, 어느 글에서나 빠지지 않는 건 ‘나’였다. 아무리 먹은 거, 잘 나가는 거 자랑하는 게 SNS라 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나’에 초점을 맞춰 지난 글들을 살펴본 이유는 <단어의 사생활>이라는 책에 담긴 어느 연구 결과 때문이다. 글의 저자인 제임스 W. 페니베이커 교수는 언어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불안하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우울한 사람은 ‘나’를 많이 사용한다. 놀라운 사실은, 부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보다 ‘나’라는 단어의 사용이 우울증을 더욱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이 심할수록 말이나 글에서 ‘나’라는 단어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자살한 시인들이 자살하지 않은 시인들에 비해서 시에서 ‘나’라는 단어를 훨씬 많이 사용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내가 우울증 치료를 받기 이전에 쓴 글과 비교하면 더욱 대비된다. 이전까지 내 SNS에 올라온 글은 대부분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얻은 결과 혹은 구성원들의 이야기, 환경, 인권, 정치 이슈 등에 관한 것들이었으며, '나'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을 훨씬 더 많이 사용했으니 말이다.

비단 우울증에 관한 진단이 아니더라도 언어가 그 사람 혹은 집단, 사회에 관해 많은 이야기해 준다는 것은 추론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사실이다. 언어란 결국 인간이 경험한 것 혹은 생각한 것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수단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컨택트'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테드 창의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는 꽤나 재미있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어느날 지구에 나타난 외계문명 헵타포드를 마주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7개의 다리와 눈을 가지고 있고, 인류는 따라잡기도 어려운 고도의 과학문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들에게는 음성언어인 헵타포드A와 기록언어인 헵타포드B가 존재한다. 이중 더 흥미로운 것은 헵타포드B이다. 이 언어 안에는 시간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를 배운 주인공은 헵타포드B의 영향을 받아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언어가 세계를, 세계가 언어를 반영하며 상호간에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은 비단 테드 창만의 생각은 아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버트런드 러셀은 ‘논리적 원자론’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언어와 그 언어에 상응하는 세계가 쌍으로 존재한다. 가령 ‘신논현역 사거리에는 교보타워가 있다’는 명제와 실제의 교보타워가 쌍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러셀의 뒤를 이은 비트겐슈타인 역시 세계와 언어의 연계성을 설명한다. 그는 언어는 ‘명제’로, 세계는 ‘사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이 각각 짝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와 세계의 구조는 논리적으로 동일하며,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묘사하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철학자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나아가는 방향은 앞선 소설가의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가령 러셀은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며 이 경우 대상의 존재, 즉 프랑스 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의미한 명제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며 형이상학 등 우리 인식 밖에서 기능하는 영역의 가능성을 축소시켰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가정을 덧붙여 보자. 만약 실제로 우리가 헵타포드를 마주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면 어떨까? 소설 속 주인공처럼 지금 우리의 인식과는 다른 형태로 세계와 시간을 인식하게 될까? 아니면 분석철학자들처럼 그들의 언어를 우리 인식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규정하게 될까? 굳이 이중 하나를 선택하자면 난 전자의 선택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저 ‘알 수 없다’며 등 돌리기에 세계는 너무나도 신기한 것,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