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전현수 기자]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보건총회를 열고 ICD-11 개정안을 통과시킬 계획을 밝혔다. 이번 개정안에 포함된 게임장애(Gaming Disorder)가 통과될지가 관건이다. 개정안이 최종 승인되면 2022년부터 각국 보건당국에 권고된다.
게임 업계 관계자들과 주무 부처, 전문가들은 해당 사안에 반대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WHO가 해당 안건을 통과시킬 것으로 내다보는 분위기다. 지난 2017년 12월 ICD 11차 개정안에 게임장애 질병코드가 포함될 것이라는 소식이 나온 후 국내외 협·단체와 저명한 인사들의 반대가 이어졌지만 WHO가 지난해 6월 공개한 개정안 내용에는 게임장애가 포함됐다.
“국내 도입 막는다”
국내 게임 관련 주무 부처와 위원회, 진흥원 등은 WHO가 해당 안건을 통과시키더라도 국내 도입은 저지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KCD(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등재를 막겠다는 방침이다.
보건복지부 박능후 장관은 앞서 ICD-11의 게임장애 질병코드를 빠르게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다만 KCD 개정은 통계청 소관이며 보건복지부와는 협업할 뿐이다. 결국엔 국민 여론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게임학회 위정현 회장을 대표로 두고 발촉한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 준비위원회(이하 공대위)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공대위는 다양한 협단체와 대학으로 구성됐으며 게임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와 콘텐츠 관련 협단체도 참여한다는 게 특징이다. 43개 단체로 모습을 드러낸 공대위는 77개까지 늘었다(5월 15일 기준). 참여 단체는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다.
위정현 공대위 대표는 “ICD-11이 통과되더라도 KCD 등재를 막아야 한다”면서 “국민 여론에 따라 등재 시기는 늦출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되며 이를 위해 공청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위정현 대표는 최근 해당 이슈와 관련한 토론회, 라디오 프로그램, 공중파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게임 과몰입 질병코드 등재 반대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측은 지속적인 연구와 결과 도출로 반박할 수 있는 데이터를 생산하겠다는 방침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강경석 본부장은 “(게임 장애 질병코드 도입은) 타당한 근거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탑다운 형식으로 도입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강 본부장은 “게임 과몰입이 질병이 되면 국내 청소년에게 큰 타격이 올 것”이라면서 “단순히 게임을 오래 한다는 이유로 일부 청소년들이 정신과 환자가 되면 그 친구들의 진학문제, 취업문제와도 직결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학부모들이 당장 게임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 질병코드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자기 자녀가 정신질환 환자가 된다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설명이다. 그는 “다양한 연구기관과 공동 연구를 통해 학술적 반박 논리나 근거를 계속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이장주 소장은 “ICD-11이 통과되더라도 KCD 개정은 막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장주 소장은 “결국 여론전이 중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문제는 질병코드 등재를 반대하는 근거를 대는 게 더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서 “문제가 있다는 건 수천수만 건의 사례 중 하나를 고르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반대편 측은 그렇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는 “분명한 건 게임중독 질병 등재는 결국 청소년들에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근본적 해결 없이는 제2·제3 질병 나올 것”…게임 업계 자정 노력도 촉구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면 필연적으로 제2, 제3의 질병도 나타날 거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5년간 2000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게임과몰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건국대학교 정의준 교수는 “제 연구결과에 따르면 청소년들에게 게임 과몰입 현상이 나타나는 건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통제력과 학업 스트레스 등 환경에 의한 요인 탓”이라면서 “만약 게임하는 걸 막더라도 청소년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돌파구를 찾을 것이기 때문에 유튜브 중독, 스마트폰 중독 등 다른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의준 교수는 “만약 게임을 질병으로 분류하면 다른 콘텐츠에서도 과몰입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해당 콘텐츠를 질병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게임중독 질병 등록을 반대하는 한편 게임 업계의 자발적인 건전한 환경 조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연세대학교 윤태진 교수는 지난 5월3일 열린 긴급토론회에서 “게임 업계에 있는 사람들도 크게 반성을 해야 한다”면서 “게임 질병화 반대를 위해 팔 하나 자를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태진 교수는 “게임 업계에선 사행성 게임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신 차리고 이를 포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언리얼엔진과 포트나이트로 유명한 글로벌 개발사 에픽게임즈의 대표도 이와 같은 지적을 했다. 에픽게임즈 팀 스위니 대표는 지난 5월 14일 열린 언리얼 서밋 행사에서 열린 공동 인터뷰 자리에서 WHO의 게임 질병코드 등재에 대해 “게임 과몰입을 병으로 분류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면서도 “게임 업계 자체에서도 수익 모델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결제를 더 많이 하면 게임 내 등급이 올라가거나 랜덤 박스 판매를 통해 유료 아이템을 배급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