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오 장관의 이라크 깜짝 방문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란 문제는 점입가경이다. 미국과 이란은 정말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고 싶은 모양인 듯싶다. 하여튼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2019년 5월 7일 월요일, 유럽 순방에 나선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돌연 독일 방문 일정을 취소했을 때부터 심상찮은 분위기가 느껴지긴 했었다. 전날 5월 6일, 폼페이오 장관은 핀란드 로바니에미에서 열린 제17차 북극이사회 각료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다음 일정은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서, 메르켈 총리와 회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폼페이오 장관은 독일 행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5월 7일 오전, 미국 국무부는 폼페이오 장관이 국제적 안보 문제로 인해서 독일 방문을 전격 취소했다고 밝혔다. 독일 정부로부터 양해를 구할 만큼 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거나, 터질 모양이었다.

폼페이오 장관의 동선이 다시 밝혀진 것은 5월 7일 오후. AFT 통신은 폼페이오 장관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폼페이오 장관은 핀란드에서 독일로 가지 않고, 메르켈 총리와 회담할 시간동안 이라크로 건너간 것이다.

AFT 통신은 이라크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서 폼페이오 장관이 아델 압델 마흐디 이라크 총리와 만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그 소식은 폼페이오 장관이 독일 방문 취소 이유로 국제적 안보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바로 이란 문제였다.

이란 정부의 핵 활동 재개 선언

하여튼 미국의 정보력은 대단하다. 절묘할 정도로 각국 사정에 한 발씩 빠르게 움직이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미국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

폼페이오 장관이 이라크에 도착한 다음날인 5월 8일 수요일, 이란에서는 중동 평화를 단숨에 깨뜨릴만한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미국의 이란핵합의(JCPOA) 탈퇴 1년을 맞아서 핵 개발을 재개하겠다고 밝히고 나선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로하니 대통령이 “지난 1년간 이란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했다.”며, “핵합의에서 정한 농축 우라늄과 중수의 보유 한도를 지키지 않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란이 핵합의 의무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핵 프로그램을 재가동하겠다는 뜻이었다. 중동 정세를 냉각시키는 발언이었다.

로이터는 이란 정부가 로하니 대통령의 대국민 선언을 통해 밝힌 내용을 서한으로 만들어 2015년 이란과 핵합의를 체결한 당사국 대사들에게 전달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AP 통신은 이 서한이 유럽연합(EU)에도 전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 재가동의 책임을 미국에게 돌리며,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겠다는 목적 같았다.

폼페이오 장관의 이라크 방문과 로하니 대통령의 핵 개발 프로그램 재가동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연속적 상황이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식이었다. 폼페이오 장관이 이라크에 가자마자, 로하니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 대국민 선언을 한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로하니 대통령의 대국민 선언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폼페이오 장관은 로하니 대통령의 대국민 성명 발표 전 날 왜 하필 이라크를 찾아간 것일까? 어차피 행동으로 곧바로 옮겨지지 않을 로하니 대통령의 대국민 성명이니, 독일에서 들으나, 이라크에서 들으나 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로하이 대통령의 대국민 선언 발표 기미를 알아낸 폼페이오 장관은 이라크를 찾아갔다.

UAE 인근 유조선 4척 피습

로하니 대통령의 대국민 선언 이후,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급거 귀국, USS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 전단과 핵 능력을 보유한 B-52 전략폭격기의 긴박한 중동 배치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미국과 이란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치닫기 시작했다. 세계의 이목은 순식간에 이란으로 쏠렸고, 이란은 원했던 주목 효과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5월 13일 월요일, AP 통신이 아랍에미리트(UAE) 동부 영해 인근에서 유조선 4척이 사보타주(의도적 파괴행위)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한 것이다. 배에 폭발물 공격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피해 선박 4척은 모두 유조선으로, 사우디 2척, 노르웨이 국적 1척, 그리고 아랍에미리트 소속 1척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해상 교통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고 경고하며, 항공모함과 폭격기를 추가로 이동시켰다. 이란이 정말로 유조선 4척에 대해 사보타주를 했다면, 향후 전개 상황은 예단할 수 없다.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걱정스럽고, 끔찍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번 사안과 이란 정부는 무관하며, 조사를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진심이 담긴 것 같은 발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란 정부의 주장을 믿어줄 나라는 없다. 지난 4월 23일 화요일, 미국이 이란 원유 수입 유예를 받았던 8개국에 대해 유예 중단을 발표하자, 이란은 기다렸다는 듯 세계 원유 수송의 길목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 뒤에 실제로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 사보타주가 발생했으니, 오히려 이 사건을 이란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중동 국가 동일체 원칙 파괴

중동 국가들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슬람, OPEC, 반미와 반이스라엘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공통점은 애증으로 얽혀 있는 중동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다.

그러나 최근 중동 국가 사이에서는 이 공통점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스라엘과 개별 중동국가들의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석유를 무기로 연대하던 과거의 행태에서 벗어나 자국 경제 상황에 맞게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또 미국의 위력을 경험한 일부 국가들은 반미에서 돌아서, 미국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이런 변화는 재스민 혁명 여파일 수도 있고,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로 인해 파괴된 중동 국가들의 석유 무기화 전략이 한계를 맞은 것일 수도 있다. 또 국제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세계인의 거부감 인식, 자본과 기술의 후진성을 자각한 중동 국가들의 현실 파악, 이라크 전을 통해 미국 군사력을 확인한 것도 이유이다.

중동 국가들은 이제 서서히 동일체 원칙을 깨뜨리고 있다. 로하니 대통령의 대국민 선언 직전, 폼페이오 장관의 이라크 방문은 사담 후세인 사후 친미 국가로 돌아선 이라크의 현실을 통해 이란의 향후 국가 모델을 제시한 것일 수도 있고, 이라크가 미국의 대 이란 공격의 전초기지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사인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미국이 이란과 전쟁을 하면, 적어도 중동 국가 동일체 원칙은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5월 9일 목요일, 뉴욕타임스는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국가안보 보좌관 회의에서 밝힌 이란 파병 계획을 보도했다. 이란이 미군을 공격하거나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경우 12만 명의 병력을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라면, 지난 2003년 이라크 침공 규모이다. 그렇게 되면, 이란도 이라크처럼 정권 교체까지 가능하다.

5월 13일 월요일, 이란 파병 계획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들은 “이란의 정권 교체를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트럼프 대통령이 “그들이 일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매우 나쁜 실수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미국은 핵 문제 원칙 불변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 원칙은 5월 4일에 이어, 9일에도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