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소기업의 본업사수경영> 오태헌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흔히들 기업은 멈추면 죽는다고 말한다. 갈수록 매출과 이익이 늘어나야 하며, 직원 수와 공장 크기 같은 회사 규모도 커져야 도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본의 장수(長壽) 기업들은 여러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일본에는 100년이 넘는 기업이 수만 개에 이르고 무려 1000년이 넘는 기업도 20개가 넘는데, 다수가 직원이 수십 명에 불과한 중소기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장에서 일본 중소기업들이 장수하고 있는 비결을 ‘본업(本業)사수 경영’에서 찾는다. 본업사수경영은 ‘노렌’이라는 일본 특유의 기업문화와 ‘고다와리’라는 작업 가치관이 빚어낸 결과이다.

노렌은 일본의 상점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천으로 만든 가림막이다. 오사카 지역 상인들의 신조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은 지킨다”이다. 장인정신을 지키며 대물림을 통해 상점을 지속하겠다는 뜻이다. 고다와리는 ‘~에 구애받다’라는 단어로, 작업에 전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권장하는 가치관을 의미한다. 저자는 일본의 장수 중소기업들은 ‘외적 성장’에 매달리지 않고 ‘내적 진화’를 거듭해왔다고 강조한다. 책에는 사양산업과 불황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본업을 사수해온 30개의 중소기업 사례가 소개돼있다.

◇기카보시연필=122년전인 1897년 연필용 나무를 가공하는 회사로 출발했다. 연필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68년전인 1951년이다. 연필은 대표적인 사양산업이다. 저출산에다 사무환경은 전산화되어 연필 사용자가 급격히 줄었다. 저가 중국연필도 물밀 듯 들어와 있다. 창업주의 4대손인 스기타니 가즈토시 사장은 연필은 초등학생을 위한 것이라는 업계 상식을 뒤집고 본업을 지켜냈다. 2011년 성인용 연필을 개발했다. 형태는 샤프펜슬이지만, 진짜 연필에 들어가는 직경 2mm의 굵은 심을 넣어 ‘쓰는 맛’을 살렸다. ‘어른들의 연필’은 100만개 이상 팔려나갔다.

연필 제조 공정에서는 40%에 이르는 목재가 톱밥으로 버려진다. 기카보시연필은 기존 판매망을 활용할 수 있는 재활용품을 궁리한 끝에 톱밥에 PVA 풀을 섞은 최초의 나무점토 ‘무쿠넨상’을 개발했다. 톱밥에 식품용 염료를 혼합해 마르면 나무가 되는 ‘우드페인트’도 출시했다.

◇우루시사카모토=1900년 창업한 전통 옻칠 공예품 업체다. 3대 사장 사카모토 아사오는 어느 날 결혼식 하객이 답례품으로 받은 칠기 공예품을 지하철역 쓰레기통에 버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그는 공예품 자체가 아니라 옻칠 기술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바로 공업용 제품에 옻칠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 납품한 미국 파커사 데스크 세트 2000개는 얼룩이 있다는 이유로 반품됐다. 칠기 수공예품에서는 별 문제가 아니던 얼룩이 공업용 제품에서는 불량품을 의미했다. 우루시사카모토는 대나무 붓으로 칠하는 전통적 옻칠 방식을 버리고 스프레이를 사용한 분사방식을 채택하는 등 정밀 코팅기술을 개발해나갔다. 지금은 고급만년필, 시계, 카메라, 헤드폰 등 세계의 각종 명품 브랜드는 물론 고급 승용차와 항공기 퍼스트 클래스의 좌석에도 우루시사카모토의 옻칠 기술이 덧입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