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숭아 2012, 캔버스에 유화, 45.5×38㎝(The peach 2012, Oil on canvas, 45.5×38㎝)

낭만주의 시대의 화가들이 자연을 관찰의 대상이기보다는 감정의 반응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사생의 의미는 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대상을 자연의 시간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며 조정하는 마음의 시간으로 대상을 멋대로 이해하려는 자아론적인 사물관을 뜻한다.

우리의 삶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그러므로 해서 모든 대상이 왜곡되어 왔다는 것은 그 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력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정지되어버린 사물을 그리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그림을 ‘정물화’라고 부른다.

▲ 술병과 자두 2013, 캔버스에 유화, 91×72㎝(Bottle and plum 2013, Oil on canvas, 91×7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하자면, 정물은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을 거부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도 20세기의 화가들은 자연을 알기 위해서는 도리어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를 거부해야 했다.

그들은 자연을 알기 위해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 속에 내맡겨진 자연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연을 맡기 위해서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를 거절했다는 뜻은 그런 시각으로 이해된다.

▲ 일본전 참가자 신항섭, 박석원, 이숙자

그러나 그들의 그림은 결국 물신숭배(物神崇拜)로 흘렀고, 모든 자연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즉 물주의(卽物主義) 시각을 확산시켰다. 그렇게 하여 사물 왜곡의 역사는 시작되고, 공간은 도리어 죽어갔다.

구자승(ARTIST KOO CHA SOONG,具滋勝,서양화가 구자승,구자승 작가,구자승 화백,KOO CHA SOONG)의 정물화를 20세기의 즉물주의와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글=박용숙|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