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그 유명한 서산대사의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라는 시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에도, 함부로 어지러이 걸어가지 마라, 오늘 걸어온 내 발자국이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된다는 말이다. 김구 선생의 친필이 공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김구 선생도 이 시를 즐겨 사용하신 듯 하다.

사시사철을 가리지 않고 등산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말이 실제로 눈 덮인 산에서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이 덮이고 나면 그 밑이 바위 틈인지, 아니면 진창인지 모른다. 그럴 때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은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것이다. 초기에 한두 번이야 눈 덮인 산야를 뛰어 다니기도 하고 좋아라 했지만, 자주 산을 찾게 되면서부터는 산행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안전한 귀환에 있다. 아름다운 추억이니 등산을 통한 건강 증진이니, 뭐니 뭐니 해도 산을 올랐다면 다치지 않고 잘 내려와야 한다.

사실 산에서는 잘 아는 길도 자칫 놓치기 십상이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등산길 주변 상황도 수시로 바뀐다. 물론 유명한 산이라면 등산객들이 줄을 지어 다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호젓한 산행을 즐기는 나로서는 평소에 늘 가던 길도 번번이 잘 못 들어서 엉뚱한 곳으로 간 적이 많다. 봄이 되어 풀이 나기 시작하면 길이 달라진다. 여름에 나무가 무성하면 주위의 시야가 차단된다. 그리고 가을에 낙엽이 뒤덮이거나 겨울에 눈이 쌓여도 길은 사라져 버린다. 그럴 때면 먼저간 사람들의 희미한 흔적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변화를 몰고 다니는 꼰대 세대

우리나라가 커다란 변화의 시기에 놓여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회 전반에 영향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부동산 시세가 바뀌고, 중소상공 산업의 지형도가 바뀌는 것은 물론 교육과 병원 그리고 그 외의 삶의 변화도 야기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본다.

이미 퇴직한 사람도 많겠지만, 실질적으로 올해를 끝으로 58년 개띠 선배들이 노동시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사회에서 58년 개띠들은 유별났다. 한 때 직장에서건 사회에서건 눈에 좀 띈다 싶으면 온통 58년 개띠들이었다.

그 세대 선배들의 꼰대질은 가히 상상불가였다. 신입으로 입사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그런 꼰대 선배들의 책상을 닦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과 동시에 걸레를 빨아 물기를 꽉 짜낸 뒤에 뽀드득 소리를 내가며 책상을 닦았다. 재떨이도 비워야 했다. 담배 진이 잔뜩 묻어있는 재떨이를 비워내고 물에 씻어 탈탈 털고 휴지 한 장을 물에 적셔 재떨이에 깔아 둔다. 책상 위의 서류며 책자들도 가지런히 정리하고 난 뒤에야 내 책상에 올 수 있었다.

회의를 하거나 회식을 하거나 어디에서도 그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먹자는 대로 먹고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한 때 오삼불고기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거의 두세 달 내내 오삼불고기만 주구장창 먹었던 적도 있었다.

아토피성 피부로 늘 피부에 대해 고민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에 나온 뒤로 나는 대중탕이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낮에 외근을 하고 들어오면서 사무실 근처에서 사우나를 하던 선배가 나와 닮은 사람을 봤는지, ‘근무 중에 사우나나 다니냐?’는 핀잔을 수도 없이 들어야만 했다. 내가 아무리 아토피 때문에 대중탕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얘기해도, 그날 그 선배가 본 것은 ‘나’ 였다.

또 한번은 그 선배가 속이 좋지 않았는지 볼 일을 보고 나온 뒤에 화장실이 막혔다며 경비 처리 해 줄 테니 ‘뚫어 뻥’을 사오라고 시켰다. 말 그대로 저렴한 뚫어 뻥을 사왔다가 그게 제대로 역할을 못하자 호되게 혼이 났다. 뚫어 뻥보다 더 좋은 뚫어 뻥을 사오라는 것이었다. 물 묻는 뚫어 뻥을 닦고선 스프링 재질로 된 좀 더 비싼 것을 사왔다. 다행이 처리는 된 모양인데, 이번에는 그걸 다시 환불을 해 오라고 야단을 쳤다. 철물점 주인 아저씨한테 말도 안 되는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 놓으며 쓰지 않고 가져온 것처럼 돈을 되 받아 왔다.

58년 개띠 선배들은 나에게 그런 기억들뿐이었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꼰대’다. 그런 그들이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그들이 환갑을 맞이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매해 태어난 신생아 수는 70만명 수준이었다. 그런데 1958년에 갑자기 100만명 수준으로 폭발했다. 보통의 세대들보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수가 더 있으니, 어디를 가도 58년 개띠들은 넘쳐났다. 사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많은 것들을 바꿔놨다. 물론 정확한 근거가 있다기 보다는 설에 가까운 얘기들이지만 말이다.

 

그들이 보일 행보에 관심을 가져야

100만명의 개띠들이 자라면서 학교에 가게 되자 교육환경이 바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도 시험을 쳐서 들어가던 것이 소위 뺑뺑이 제도로 바뀌었다. 그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우리나라에 고학력자가 확 늘었다. 또 그들이 산업 역군이 되면서 대한민국은 급성장을 거듭했다. 하루에 세끼 밥만이라도 먹고 살았으면 하던 때가 있었지만,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 올림픽까지 치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개띠들만의 힘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 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서울에 살던 개띠들이 퇴직해서 집을 좀 줄이고 남은 돈으로 지방으로 이사를 한다면 서울과 지방의 부동산 가격이 바뀔 것이다. 또 그들이 가진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자영업자의 세계로 뛰어든다면 치킨의 세계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를 위해 금융권으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퇴직금을 맡긴다면 금융시장의 변화도 몰고 올 수 있겠다. 또 그들이 더 나이가 들어서 요양을 받게 된다면, 이십 년 전부터 뜰 것이라는 말만 무성했던 실버산업이 정말로 본 궤도 오를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세대이건 간에 한결 같이 ‘자기 세대가 더 특별하게 고생했다’는 얘기들을 한다. 나 역시 빡빡 깎은 머리, 검정 교복에 모자를 쓰고 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년 반 만에 교복을 벗고 머리도 세 손가락 정도 길이로는 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고등학교는 시험 쳐서 들어갔고, 갑작스레 학력고사라는 명칭으로 바뀐 대입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그 해 처음 시도된 논술고사에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사회 초년병 시절에 IMF의 직격탄을 받고 비틀거렸으며, 대기업 차장으로 진급하며 애 잘 키우고 화목하게 살려던 찰라에 글로벌 금융위기의 폭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기도 했다.

늘 내 앞에 있던 꼰대들에게 보이지 않는 적대심을 품고 있었고, 그들에게 머리는 조아렸지만 내 입 꼬리는 아래를 향했었다. 모니터 전원을 켜지도 않고 컴퓨터가 작동이 되지 않는다며 수시로 불러서 야단을 쳤고, 세상에서 제일 느린 독수리의 타법으로 겨우 몇 줄의 문서를 받으려고 한나절을 버텼다. 연필로 쓰는 동안 타이핑을 했으면 바로 끝날 일인데, 괴발개발 써놓은 자료를 퇴근 무렵 던져주고는 아침에 보겠다고 했다. 사용할 일도 없으면서 야후 메일 계정이 생겼다며 동네방네 자랑을 해댔고, 그들의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는 군용 모포 한 장이 들어 있기도 했다.

언젠가 나이 50에 아직도 실수 때문에 자책하는 나에게 선배가 해준 얘기가 기억난다. “나이 50이 되니 어른 같지?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어른으로 산 것 다 합쳐봐야 얼마 안돼. 그러니 실수 하면서 사는 게 당연하지.” 무슨 말인지 멀뚱멀뚱 쳐다 봤더니, 웃으시며 그 말을 풀이해 주셨다. 살아온 인생이 50년이지만 서른 살 이전은 애니까 그걸 빼면 20년인데 잠 자는 시간, 밥 먹고 똥 싸고 한 것처럼 인간의 본능으로 행동하는 시간 빼고 나면 남는 게 겨우 몇 년에 불과하단다. 결국 쉰 살에도 우리가 어른입네 하고 산 시간은 몇 년 되지도 않는다는 농담 같은 진담이셨다.

세계 어느 국가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린 고령화 사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애 우는 소리가 끊어진 곳의 미래는 없다고 한다. 지금은 정년이 60세이지만 얼마 있지 않아 65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잘 살게 된 것도 아니다. 그렇게 힘들게 일구어 놓았지만 지금 세대는 먼저 간 세대들에게 불만만 잔뜩 안고 있다. 안팎에서 꼴불견만 자아내던 꼰대 선배들의 모습이 그리운 것은 절대 아니다. 눈 쌓인 들판에서 그들은 항상 나 보다 앞서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들의 발자국을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미워도 다시 한번, 새로운 노년의 바다로 먼 항해를 떠나는 58년 개띠 꼰대 선배들의 장도에 건승을 기원하는 마음 가득 담아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