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133조원을 투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을 24일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발표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장악한 계기가 됐던 1983년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동경선언의 연장선에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부수가 있다는 평가다.

▲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이 눈길을 끈다. 출처=삼성전자

삼성전자의 반도체 분투기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1974년 적자 투성이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반도체 시장 진입에 나섰다. 1947년 윌리암 쇼클레이가 최초의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며 미국 반도체 시장 경쟁력이 탄탄대로를 걷던 사이, 고 이병철 회장은 특단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일본 전자업계의 사정에 밝았던 그가 향후 미래 ICT 전자 산업의 핵심으로 부상하던 반도체에 집중한 순간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아들인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에게 한국 반도체에 대한 전권을 맡겼다. 이건희 당시 이사는 충무로에 있는 외국 서점에 직원들을 급파해 반도체라는 문구가 적힌 책을 모조리 구입했고 이를 정독했다. 이후 실리콘밸리로 날아가 직접 인재 영입 세일즈를 펼치며 삼성전자 반도체 경쟁력의 초석을 쌓았다.

1983년 2월, 역사적인 동경선언이 나왔다. 고 이병철 회장은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당장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비야냥이 쏟아졌고, 일각에서는 ‘3년 안에 사업을 접을 가능성이 높다’는 비웃음도 나왔다. 삼성전자는 그러나 1983년 12월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고 1992년에는 64메가 D램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해냈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D램 시장 1위에 오르는 순간이다.

고 이병철 회장의 동경선언은 현재의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결정적 계기로 평가받는다. 그 동력은 이건희 회장에게 이어져 삼성전자가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맹주로 부상할 수 있는 기본 인프라가 됐다는 분석이다.

▲ 삼성전자는 토탈 5G 라인업을 가지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제2의 동경선언?

1983년의 동경선언이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신화의 효시라면, 24일 발표된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은 삼성전자의 본격적인 시스템 반도체 시장 공략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상황은 동경선언 당시보다 좋다. 그러나 경쟁자들은 더 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시스템 반도체가 6.5, 메모리 반도체가 3.5를 점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 글로벌 1위 사업자로 군림하고 있으나,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사정이 복잡하다. 무엇보다 전통의 강자 인텔이 버티고 있으며 비즈니스 방식에 따라 팹리스와 파운드리로 세분화되어 각자의 공급선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당장 팹리스에 뛰어들 요인은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 이유로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에는 국내 팹리스 업계와의 상생이 강조되어 있다. 삼성전자는 이를 기점으로 정부의 강력한 지원 의지를 지지대로 삼아 파운드리에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 삼성전자 클린룸이 보인다. 출처=삼성전자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의 TSMC가 점유율 50%를 유지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최근 20%의 선으로 뛰어 올랐다. 3위 사업자인 글로벌 파운드리가 7나노 공정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매각 수순을 밟은 가운데 당분간 TSMC와 삼성전자의 치열한 신경전이 예상된다.

삼성전자가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장악하려면 업계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입체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소품종 다량생산이 특징이기 때문에 제조업의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접근하기가 편했으나,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스템 반도체는 시장 진입 초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 지점에 착안한 맞춤 전략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TSMC 등이 보유한 물량 공급 라인을 어떻게 공략하느냐도 관건이다. 미세공정으로 돌입하며 한 번 정한 공급선을 급진적으로 바꾸기는 어려운 가운데, 삼성전자가 TSMC의 물량을 당장 가져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평가다. 그 연장선에서 인수합병 등 빅딜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입체적 접근으로는 관련 생태계 조성, 나아가 인공지능 및 5G를 총 망라하는 큰 그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가 저장을 의미한다면 시스템 반도체는 일종의 두뇌로 비견된다. 삼성전자가 당장 팹리스의 역할을 맡을 가능성은 낮지만, 시설 호환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ICT 경쟁력을 파운드리에 담아내는 노력을 해낸다면 빠른 성과 창출도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근 삼성전자가 인공지능 및 5G 등의 다양한 전자 ICT 역량을 키우는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의 행보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동경선언에 이어 현재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적으로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시장 장악 의지를 밝혔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전쟁이 시작된 가운데,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의 행보와 이 부회장의 전략적 판단 방향성에도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