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1971년 영국, 가난한 동양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신사는 5만 분의 1 백사장 지도와 함께 500원 지폐를 펼쳐보였다. 그는 자기를 호기심 반, 불신 반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 돈에 그려져있는 것이 철갑선 거북선이라는 배요.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실적과 두뇌가 있소. 영국 조선의 역사는 1800년대로 알고 있소. 우리가 300년 앞섰다는 뜻이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 것이 불과 20년 전 일이다. 아직은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조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벅차할 시기,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마포 조선소 건립에 나섰다. 문제는 자금. 이에 그는 영국으로 날아가 차관 협상을 벌이며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빼들었다. 그의 승부수는 통했을까?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부침의 역사를 겪고 있으나,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조선업계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 고 정주영 회장이 앉아있다. 출처=갈무리

우리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사람에게 선각자, 프론티어, 퍼스트 무버라는 명칭을 붙인다. 그리고 한국 경제사의 뜨거운 혈맥은 이 선각자, 프론티어, 퍼스트 무버의 치열하고 눈물겨운 분전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오래된 영웅시대를 꺼내다
지금은 인공지능 기술력이 대중화 전철을 밟고 사물인터넷에 이은 스마트홈, 나아가 자율주행차 및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논하는 시대다. 기존 '굴뚝공장' 경제 패러다임은 고루하고 오래된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있으며 세상은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ICT 거인의 손에서 춤추고 있다.

대한민국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3G 정국에서 정보통신패권을 장악했던 한국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속인터넷 속도, 스마트폰 보급률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5일 세계 최초 5G 상용화에 성공했으며 삼성전자는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 폴드로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대한민국 ICT 경쟁력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최근 그와 비례해 잡음도 커지고 있다. 5G 정국에서는 5G 커버리지 논란이 거세다. 통신3사의 5G 커버리지가 예상보다 좁다는 지적이 나오는 한편 중국 화웨이와 협력한 LG유플러스는 아예 수도권 중심의 5G 커버리지만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빈축을 사고 있다. 결국 정부까지 나서 민관 합동 TF를 운영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세계 최초에 천착하면서 결국 대형사고를 쳤다"는 비야냥도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의 폴더블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갤럭시 폴드는 올해 100만대 판매를 목표로 최근 미국에서 사전예약에 돌입했으나, 화면 오류 논란에 휘말리며 최근 출시를 연기했다. 갤럭시 폴드의 힌지 이격 현상과, 디스플레이 보호막 제거 등이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역시 일각에서는 "20만번 폴딩 테스트를 해도 문제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면서 "삼성의 폴더블 스마트폰은 당장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시야를 넓혀 전체 ICT 전자 업계 전반을 봐도 부정적인 반응 일색이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업황악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디스플레이 등 ICT 경쟁력 전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 갤럭시 폴드 폴딩 테스트가 이어지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대한민국 ICT 전자 역사는 이대로 동력을 상실하는 것일까? 1990년대 전자왕국 일본의 왕좌를 찬탈한 대가를, 이제 중국에 왕좌를 내어주며 치르는 것일까?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바로 이 순간, ICT 전자 최첨단 세계의 초연결 패러다임을 맞이해 어려움을 겪는 지금 우리는 오래된 영웅시대를 다시 꺼내 볼 필요가 있다. '굴뚝산업' 시대를 관통하며 처절하게 분전하면서 쌓아올린 선각자, 프론티어, 퍼스트 무버의 DNA를 일깨울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5G 세계 최초와 폴더블 스마트폰의 조기 도입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이를 무조건 비하하고 깎아 내리는 이들에게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일갈이 필요하다. "해 봤어?" 무모해 보이지만 불굴의 의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5G 세계 최초 상용화가 특유의 조급함으로 전체 로드맵이 무너진 대목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퍼스트 무버의 의지 자체를 깎아내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시류에만 따라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관건은 행동력이며, 세계 최초로 5G 상용화에 돌입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ICT 선진국이었다고"라는 패배의식에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동경선언이 화두를 던질 수 있다. 미국은 1947년 윌리암 쇼클레이의 손에서 세계 최초 트랜지스터가 탄생하며 반도체 산업에 나섰으나, 한국전쟁 직전의 한국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반도체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결국 고 이병철 회장이 결단을 내린다. 1974년 삼성전자가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산업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3년 2월 8일 역사적인 동경선언이 나온다. 극동의 작은나라에서 막 전자사업을 시작한 기업이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 시장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당장‘어리석은 선택’이라는 비야냥이 쏟아졌다. 심지어 '3년 안에 사업을 접을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반응도 나왔다. 그러나 고 이병철 회장은 굴하지 않았다. 성과는 나왔다. 1983년 12월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며 승기를 잡았고, 이후로는 우리가 아는 역사가 그대로 펼쳐진다. 현재 삼성전자는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최강자다.

5G와 폴더블 스마트폰 등 새로운 퍼스트 무버의 숙명과 고 이병철 회장의 동경선언은 '패배의식을 걷어낸 회심의 승부수'라는 교집합이 있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우직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 그 여정에 최대한 발목을 잡지는 말아야 한다.

▲ 5G 커버리지 문제가 화두다. 출처=KT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다
오래된 영웅시대의 방식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빛이 강한만큼 정경유착, 중소기업에 대한 갑질 등 어두운 그림자도 깊다. 그러나 새로운 ICT 시대의 미래를 준비하며 오래된 영웅시대는 반드시 참고해야할 필독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패배감으로 기가 죽을 필요도, 의미없는 발목잡기로 일관할 이유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

대한민국 ICT 경쟁력도 바꾸고 보완해야할 지점이 많다. 5G 세계 최초 논란을 두고 벌어지는 커버리지 이슈의 경우 '불필요하고 의미없는 레토릭에 지나치게 매몰된 것은 아닌가'라는 성찰이 필요하다. 갤럭시 폴드도 마찬가지다. 시장 초반 트렌드를 주도하는 퍼스트 무버가 다양한 논란에 휘말리는 것이 일종의 숙명이라지만 '다른 길은 없었을까'라는 고민이 필요하다.

더욱 정교해질 필요도 있다. 고 정주영 회장이 500원 지폐 하나로 차관을 얻은 것은 아니며, 당시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서류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고 정주영 회장이 가진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경영 감각에 치밀한 기반 작업, 정부의 감각있는 지원이라는 삼박자가 어우러졌기에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실력자 롱바텀 애플도어 회장이 마음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ICT 대한민국이 무겁게 인식해야 할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