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많은 4월입니다.

바람은 겨울을 넘어온 나무들을 흔들어 깨우고, 겨울에 잠겨있던 대지를 깨우기 위해

그렇게 분다고 하지요. 왜 안 그렇겠습니까?

잿빛으로 겨울처럼 단단히 죽어보였던 나무나 대지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어디 나무나 대지뿐 일까요?

사람들을 흔들고, 깨우기 위해서도 그렇게 바람이 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최근의 구직 동향 기사를 보았는데, 경기가 나쁜 영향도 있겠지만,

많은 구직자들이 이제는 몸을 쓰는 기술 교육이나 농업 교육 등에 몰린다 합니다.

아주 오래된 일들로 돌아가는 거라 생각되며,

바람 많은 봄에 어울리는 일이라고도 여겨집니다.

내 주변도 둘러보니 또 그렇게 몸을 쓰는 선배나 친구들이 많이 보입니다.

퇴직하고 야생화 전문가로 나선 선배에, 전국 산을 타며 임목 조사 등의 일을 하며

땀을 흘리는 선배도 있습니다. 봄날에 전원주택에 가서 텃밭 가꿀 생각에

겨울철 몸이 근질근질했던 친구도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며 오래 꿈꾸어온 나무에

가까이 가기위해 퇴직 후, 수목 기술자로 변신위해 열심히 교육받는 친구도 있고,

퇴직하자마자 겨울 초입에 구청에서 겨울 대비용으로 가로수의 밑둥 보호하는 작업에

기꺼이 나섰던 친구도 있습니다. 물론 진즉 생업으로 몸을 써온 귀한 분들이 있어왔고,

또 현재도 자기 자리에서 여전히 몸을 쓰는 지인들도 많습니다.

세상이 평평해지고 정직해지는 건지, 아무튼 주변에 몸을 쓰겠다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이러한 지인들에게 복음이랄까, 덕담이 되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시골 집 마당이나 텃밭 등에서 경험해본 기억이 있을듯 합니다.

우리가 몸 쓰는 것을 잠시라도 게을리 하면 ‘정원이 정글이 된다’는 말.

바로 이 정직한 법칙이 고된 일을 피할 핑계도 됩니다만,

한편으로 몸을 써야하는 매력과 이유도 되니 기대되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사실 이 말은 사회학자가 민주주의도 관심으로 가꾸지 않으면

정글 사회가 된다는 의미로 했습니다만, 실제 정원이나 밭에 더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또 같은 맥락의 얘기도 위로로 들립니다. 작년에 별세한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이라는

필립 로스의 널리 알려진 문장에는 이런 것이 있더군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간다‘

그는 50년간 평생 일해 31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열심이던 그가 2012년 ‘쓸 만큼 썼다’며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돌연 에세이 모음집을 냈습니다.

‘내게 글쓰기는 자기 보존의 과업이었습니다’

‘왜 쓰는가?’에 대한 답인데, 그의 일하는 자세에 다름 아니었겠지요.

영감을 기다리지 않고, 몸 쓰는 지인들의 건투를 빌어봅니다.

그러며 ‘나도 조만간 따라가리라’고 봄바람에 약조를 실어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