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두 1998, 캔버스에 유화, 38×45.5㎝(Plum 1998, Oil on canvas, 38×45.5㎝)

열린 공간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비어있다’는 서양적인 공간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형태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비어두는’ 공간인 것이다. ‘비어있음’은 수동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반면에 ‘비어둠’은 능동적인 태도를 말한다. 능동적인 태도는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동양화의 여백개념은 비표현적인 공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백 그 자체도 표현의 하나인 까닭이다. 소재를 놓는 방식에 따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의 여백개념은 거기에 사유의 여지를 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소재가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상대적으로 여백이 크면 그림과 마주하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소재와 감상자의 사이에 공간이 끼어들면서 긴장이 해소되는 것이다.

시거리가 가까운 경우에는 소재와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게 마련이다. 소재를 바라보는 감상자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이 몰려드는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상대가 코앞에 있으면 심리적인 압박감이 클 수밖에 없듯이 그림을 보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소재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의 경우에는 호소력이 강한 반면에 시각적인 부담이 따른다. 그의 그림은 바로 이와 같은 시각적인 부담을 해소시키고 있다. 공간을 많이 열어둠으로써 심적인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의(ARTIST KOO CHA SOONG,具滋勝,서양화가 구자승,구자승 작가,구자승 화백,KOO CHA SOONG)그림에서 말하는 열린 공간은 동양화에서처럼‘비어두는’ 다시 말해 캔버스에 물감을 전혀 바르지 않은 소지 자체로 남겨두기도 한다. 그리고자 하는 소재만이 캔버스의 마대위에 하나의 섬처럼 존재한다. 이는 확실히 동양화의 여백개념에 합당하다.

먹이나 물감을 전혀 바르지 않은 채로 두는 닥종이 그대로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동양화에서처럼 정적이 깃들인다. 그 정적은 정태적인 침묵이 아니라 사유 미 생성의 기운이 가득한 우주의 무한공간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우주를 포괄하는 사유를 매개로 하여 새로운 의미의 우주공간의 한 부분으로 존재케 되는 것이다. 모든 물상은 현상계 즉,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형태 자체의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글=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