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의회 설득에 실패한 메이 총리

영국 의회가 또다시 브렉시트 대안 마련에 실패했다. 2019년 4월 1일, 로이터통신은 영국 하원이 실시한 브렉시트 투표에 대해 보도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결국 부결.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상황은 이렇다. 브렉시트를 주도하는 메이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4가지 방안을 준비했다. 그리고 의회에서 투표를 통해,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의원들에게 ‘의향투표’(indicative vote)를 실시했던 것이다.

4가지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구적 포괄적 관세동맹 협정 체결하는 것. 둘째, EFTA(유럽자유무역연합)에 가입, EEA(유럽경제지역) 협정에 참여하는 노르웨이식 브렉시트 협정 체결하는 것. 셋째. 의회를 통과한 브렉시트 방안에 대한 확정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 넷째, 아무런 합의 없이 EU을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 방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EU 탈퇴를 규정한 리스본 조약 50조를 폐지하는 방안 등이었다.

결국 메이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원점에서부터 다시 브렉시트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는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의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영국 하원은 지난 달 3월 27일에도 8가지 브렉시트 대안을 놓고 의향투표를 실시했지만, 그때도 8건 모두 과반의 찬성표를 받지 못하고 부결됐다.

 

임기응변으로 시작된 브렉시트 논의

브렉시트 논의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영국의 국익이나, EU의 흥망을 중심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었다. 2015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위기 국면을 타개하고, 선거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2013년 1월, 캐머런 영국 총리는 다보스포럼 참석 직전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2016년에 하겠다고 발표했다. 집권 4년차를 맞은 캐머런 총리의 인기는 좋지 않았다. 국민들은 캐머런 총리가 영국의 위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위기는 3가지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독자적인 화폐 파운드화를 사용하는 영국이 금융위기를 맞은 EU 회원국들을 위한 금융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국제관계적인 측면에서는 금융서비스업 의존도가 높은 영국이 지나치게 EU의 금융 감독 규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독일이 주도하는 강제 난민 할당 제도로 인한 테러 위협 급증하는 것이 문제로 여겨졌다. 그래서 영국 국민들 가운데 일부는 영국의 EU 참여가 영국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영국 사회는 EU 탈퇴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EU 탈퇴가 불러올 파장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국의 EU 탈퇴는 크게 거론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캐머런 총리가 그런 사회적 금기를 깨고, 브렉시트를 2015년 5월 선거에서 쟁점화 했다. 그러자 ‘보수당이냐, 노동당이냐?’를 따지던 선거는 ‘브렉시트냐, 아니냐?’로 전환되었다. 결국 선거는 보수당의 승리로 끝이 났고, 보수당은 캐머런 총리의 공약대로 브렉시트를 결행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브렉시트를 처음 제안했던 캐머런 총리도 사태가 그렇게 발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브렉시트 논의를 쟁점화한 캐머런 총리는 물러났고, 메이 총리가 새로 들어섰다.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메이 총리

2019년 4월 2일, AFP 통신은 메이 총리가 승부수를 던졌다고 보도했다. 제1야당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와 손잡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코빈 대표는 EU와의 긴밀한 관계 유지를 주장해온 인물이지만, 굳이 메이 총리가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아무런 합의 없이 EU에서 떨어져 나오는 ‘노딜 브렉시트’만은 막으려는 의도이다.

메이 총리는 “영국 의회에서 다수가 찬성하는 합의안이라면 이행할 것”이라면서 “이는 나라에 결정적인 순간이다. 국가의 이익을 구현하려면 국가적인 통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코빈 대표는 메이 총리가 그동안 고수해온 입장을 선회한 것 같다면서 제안을 승낙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그동안 메이 총리가 사실상의 연정 파트너인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과 집권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파 의원들을 설득하는 대신, 자신과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적군과 타협을 시도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투스크 의장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끝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모르지만 인내심을 가져 보겠다.”면서 브렉시트 날짜를 또 연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투스크 의장은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에 대한 결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택에 대해, 보수당 내 대표적 브렉시트 강경파 인사 제이콥 리스모그 의원은 즉각 불만을 표시하면서 “이건 매우 불만족스러운 접근법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인물로부터 지지를 구하는 행동은 보수당원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도 성명을 내고, “그동안 보수당원들이 ‘악마’ 취급했던 제러미 코빈 대표와 브렉시트의 미래를 놓고 하도급 계약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우리는 국민투표 결과가 존중받길 원한다.”고 밝혔다.

 

다우닝가 10번지의 현인 대처 총리에 대한 기억

지금이 대영제국 300년 역사 중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일까? 메이 총리는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 영국의 가장 큰 위기는 지금이 아니다. 43년 전인 1976년, 영국이 국가 부도위기 사태에 빠져 IMF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였다.

반세기 전까지 세계 25%를 식민지로 두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은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뒤 21년 만에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졌다. 만성적 경기침체에 빠진 영국은 복지국가에 대한 기대만 높았을 뿐, 이것을 뒷받침할 활력을 찾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데모, 시민들의 무질서가 이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 영국의 가장 큰 문제는 세계 1등 국가의 자부심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위기를 극복한 사람이 바로 대처 총리였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1년간, 대처 총리는 무기력, 고임금, 저효율의 영국병을 치유하며 금융위기를 극복했고, 노후화된 산업구조를 개선하며 국가경쟁력을 강화했다. 또 19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구소련체제에 대항하는 강력한 국제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처 총리는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장수 총리였다.

메이 총리는 대처 총리를 떠올리는 영국의 2번째 여성 총리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보여준 모습은 대처 총리의 리더십에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끝까지 보여주지 못하고 물러날 수도 있다. 브렉시트 대안 마련에 실패하면 퇴진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처 총리와 메이 총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처 총리는 반대하는 국민을 설득해서 이끌고 나갈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이 리더십은 대영제국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메이 총리는 33년 의정생활 속에 품은 대영제국의 포부를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대영제국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