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약방문이라는 말이 있다. 일이 터지고 나서 뒷수습 하기 보다 사전에 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힘도 덜게 된다. 회사 일도 한 방에 해결하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미리 공유하고 제대로 된 프로세스를 밟아 나가는 것이 잘 하는 방법이다.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미리 알고 대처하면 호미로도 가능하지만 때를 놓치면 불도저를 동원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1년 동안 프로스포츠단을 맡아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 전 직장에서도 여자 프로골프단 창단을 위한 준비도 했고, 철인3종경기 선수단 운영과 각종 지원업무를 해 본 경험도 있다. 하지만 남자프로배구 선수단을 운영한다는 것은 그 전에 맛봤던 경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엉겁결에 프로스포츠단 인수는 했지만 그룹 내에서 반대 기류가 심상찮았다. 더구나 최고 경영진이 바뀌면서 이전에 추진 하던 많은 것들이 틀어졌다. 사소한 것들도 진행이 쉽지 않았다.

 

일목요연 정리보다 툭툭 던지는 게 때론 먹혀

가장 큰 문제는 소속 선수들과 연봉 계약을 체결해서 6월 말까지 연맹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정해진 시한 내에 선수들과의 계약서가 도착하지 않으면 프로선수들은 그 해에 실직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예산이 없던 상황이라 계약을 그대로 진행하기도 힘들었는데, 전반적인 연봉 인상이 필요한 시기였다. 제대로 된 연봉을 맞춰줄 필요도 있었지만, 몇몇 핵심 전력의 선수들에겐 곧 있을 FA(Free Agent)를 대비해 최소한의 방어막으로써 적절한 수준의 연봉이 절실했다.

전임 경영진 체제에서 진행됐던 일이었기에 인수 그 자체부터 호의적이지 못했던터라, 타 구단처럼 많은 연봉이나 프로에서 누릴 수 있는 각종 혜택은 언감생심이었다. 연봉 인상 근거로 '정확한 수치와 통계 자료’가 요구됐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막 인수한 상황에 어떻게 난관을 뚫어 나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자료도 문제였지만 프로스포츠에 대한 낮은 이해도와 인식 수준이 더 심각했다. 그 즈음 엉뚱한 경영 이슈가 터지기도 했고, 되팔라는 지시도 떨어져서 하마터면 스물 다섯 명의 프로 선수 및 코치진들이 무직 상태로 일년을 보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그 전처럼 해서는 열흘도 남지 않은 기간 동안 경영진을 일일이 설득하고 모든 절차를 밟는다는 것은 불가능이라 판단했다. 작전을 바꿨다. 후보까지 포함해 있지도 않은 수년간의 각종 성적 통계와 분석자료만 따진다면 하세월이었다. 기초적인 것들부터 하나 하나 이해시켜가며 설득하는 것도 지난해 보였다. 과감하게 서류를 놔 버리고, 예방주사 전략으로 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결재나 보고가 있을 때마다 정보를 슬쩍슬쩍 흘렸다.

"연맹에서 평가하는 가장 우수한 선수입니다."

"경쟁 구단에서 눈독 들이고 있습니다."

"비슷한 연차의 다른 팀 선수는 연봉이 훨씬 높습니다."

"경쟁 구단에선 지금보다 네다섯 배의 연봉도 줄 용의가 있다고 합니다."

“연봉이 너무 낮아서, 내년 FA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했던가, 처음 연봉 인상을 얘기했을 때만해도 펄쩍 뛰면서 타당한 근거부터 대라고 했었는데, 여기저기서 들었던 정보들로 찔러대니 며칠 지나지 않아 오히려 경영진에서 먼저 언급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걔는 연봉을 좀 올려줘야겠지?"

"걔를 노리는 팀들이 많다며? FA가 언제야?"

그 전략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해, 결국 내부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며칠이 더 지나자 경영진에서 먼저 연봉 협상과 계약을 진행하자는 의사를 비췄다. 마감시한까지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이어서 내색은 않았지만 그야말로 똥줄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빨리 기안 가져와, 사인해 줄 테니.”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준비해 간 결재서류에 사인을 받아왔다. 선수들이 적절히 인상된 연봉 계약서에 모두 사인해서 보내는 데는 불과 이틀 정도에 끝났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때는 하루하루 식은 땀 나는 아찔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궁금증이 쌓이면 폭발, 궁금하기 전에 궁금증을 풀어라

커뮤니케이션에서 예방주사 전략은 여러모로 효과적인데, 언론에 대해서도 아주 찐한 경험이 있다. 근무하던 회사는 3가지가 없기로 유명했다. 창사 50년이 넘는 오랜 동안 한번도 적자가 없었고, 대외 커뮤니케이션팀이 없었고, 회사 간판이 없기로 유명했다. 이름하여 三無 회사였다. 이 중 두 가지는 지키지 못했다. 내가 입사하면서 해당 팀이 생겼고, 55년만에 첫 대규모 적자를 낸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커뮤니케이션과 간판은 회사를 외부에 알리는 것들이다. 80년대 초반 엄청난 홍역을 겪은 뒤로는 외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경영해온 결과였다.

상장 기업은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차단할 수가 없는 법인데, 그나마 돈을 잘 벌 때는 여론이 무서울 것 없었지만, 궁지에 몰리는 상황에서는 여론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는 창사 이래 55년만에 첫 적자를 내게 생겼는데 한 해 동안 발생한 당기순손실만 수천억 원에 이르러 그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다행이 쪼그라 들었어도 영업이익은 났었고, 매출이 조금 증가한 것이 위안이었다. 이전에 없던 사채상환손실, 투자자산처분손실, 투자자산손상차손, 지분법손실 같은 항목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대규모 손실로 이어졌다.

사업보고서는 매년 3월 말에 공시된다. 피할 수도 없다. 언론이 꼬집기 좋은 소재였다. ‘창사 55년만의 첫 수천억 원 적자!’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여론이 때리기 시작하면 재기를 노리던 기업의 여러 상황이 악화될 것은 뻔했다. 몇 달 전부터 불면증으로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가 실적 관련 질문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들이 이어져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몇 개월 전부터 만날 수 있는 모든 기자들을 다 만났던 것 같다. 산업부, 증권부, 경제부, 금융부 회사와 조금이라도 연관 될 수 있는 기자들을 만나서 먼저 실토했다. 공시 문제 이기에 숫자를 얘기할 순 없었지만, ‘임직원들이 열심히 했으나 대규모 해외 투자가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려 큰 손실로 이어졌다,’ ‘창사 55년만에 첫 대규모 적자로 딱 기사감이지만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언론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이해를 계속 구했다.

처음엔 기자들의 반응이 한결 같았다.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는 기사감’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수 개월 동안 만나는 기자들마다 설득하고 이해를 구했다. 지나간 실적도 중요하지만 노력해서 개선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달라고 호소했다.

마침내 실적 공시가 나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창사 이래’, ‘첫 적자’, ‘대규모 적자’ 같이 우려되던 이야기는 전혀 없이 한결 같이 ‘재무개선 노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거의 모든 매체에서 실적을 다루는 기사를 쓰긴 했지만 우려되는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기자들이 ‘몇 군데에서는 적자를 꼬집는 기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언급되지도 않다니’하며 놀라워했다.

 

큰 거 한 방 보다 작은 긍정을 계속 쌓아라

회사를 좀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시장에서 관심을 받아 주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디나 할 것 없이 다들 생각하는 숙제다. 대부분 ‘큰 거 한 방’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큰 계약 한 건, 대형 수출 오더 한 건, 대박 상품 하나만 잘 기획하면 하는 심정들을 가진다. 물론 규모에 따라서 계약 한 건으로 회사 살림이 확 펴질 수도 있다. 그런 소식에 상한가에 갈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크지 않더라도, 당장 대박은 아니더라도 자잘한 긍정 소식을 지속해 알려야 한다. 주가가 당장 크게 움직여 주지 않더라도 계속하는 것이다. 신문 지면은커녕 온라인에서 한 두 줄짜리 단신으로 처리 되더라도 시장과 커뮤니케이션하고 회사와 구성원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작은 소식에 처음에는 시장이 냉랭하게 반응할 지도 모른다. 주가 변화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오르기는커녕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쌓아가야 한다. 회사는 힘들게 노력하여 수확했지만 언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때도 단발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 작은 긍정이 쌓이는 것이 갈수록 파괴력도 커진다. 시장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차근차근 쌓아 올린 것은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는다.

무언가 결정하는 데에 이론적인 근거와 합리적인 설득이 무기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강력한 무기는 따로 있다. 큰 작용을 해 낼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서서히 감염되는 바이러스처럼 슬쩍 찔러주는 예방주사가 더욱 효과적일 때가 많다. 단, 사실이 담겨 있어야 하고 진정성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그게 커뮤니케이션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