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장영성 기자] 글로벌 자동차 트렌드는 승용차에서 스포츠형다목적차량(SUV)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시작은 미국에서부터다. 유가가 하락하며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미국의 SUV 인기는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기술의 발전으로 연비와 승차감이 좋아지고, 디자인 역시 수려해지면서 세계의 소비자들이 세단이 아닌 SUV를 선택하고 있다.

미국 자동차 시장은 세단보다 SUV가 잘 팔린다. 미국의 2018년 자동차 판매량 1위는 포드 픽업트럭 F-시리즈다. F-시리즈는 2017년도에는 90만대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2018년에는 91만대 가까운 판매량을 보이며 미국에서 판매된 최고 인기 차량이다. F-시리즈는 현재까지 미국 판매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픽업트럭을 제외한 전체 판매 1위는 토요타 SUV RAV4다. 지난해 닛산 로그와 치열한 경쟁 끝에 1위 자리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닛산 로그 역시 SUV 모델이다. 혼다 CR-V, 쉐보레 이쿼녹스, 포드 이스케이프, 지프 체로키, 현대 투싼 등의 판매량이 지난해 크게 상승했다. 이들 차종은 SUV다. 중대형 SUV 포드 익스플로러가, SUV 중에서는 지프 레니게이드가 가장 많이 팔렸다.

 
▲ 퍼센트 단위는 전년 대비 판매량 증감.

SUV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세단 판매량은 자연스레 하락했다. 세단 중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한 모델은 토요타 캠리다. 그런데도 전년 대비 11%나 판매량이 하락했다. 토요타 캠리와 코롤라, 혼다 어코드와 시빅, 닛산 알티마와 센트라, 쉐보레 말리부, 현대 쏘나타 등 주요 모델의 판매량이 모두 부진하다.

미국 시장에서 SUV가 선전하는 이유 역시 여러 가지다. 그중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유가 변화다. 2008년까지만 해도 미국 시장에서는 전통적인 형태의 승용차가 SUV보다 더 많이 판매됐다. 판매비율은 승용차가 51%, 트럭을 포함한 SUV가 49%였다. 당시 미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4.10달러(약 4570원)였다. 중동 전쟁, 세계적 소비 급증, 투기수요 증가로 유가 가격이 높았다.

그러나 높은 휘발유 가격을 두고 보지 못한 미국이 셰일가스를 포함해 석유 추출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면서 휘발유 가격이 급락했다. 미국의 석유 개발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8년 민간업체에 8093㎢에 달하는 콜로라도, 유타, 와이오밍주 셰일가스 광구 개발을 허용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미국은 전통적인 수직채굴 공법에 수평 시추-수압파쇄기술을 함께 사용하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물론 공법 기술이 개발됐다고 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은 아니다. 석유와 천연가스의 가격이 치솟으면서 개발비용을 상쇄하고도 이익이 남기 시작한 것이 대량생산의 직접적 원인이다. 글로벌 유가 데이터연구소 개스버디닷컴에 따르면 미국이 투자를 시작하자마자 석유 생산이 10년 전만 해도 500만 배럴이었으나 현재 1000만 배럴로 두 배 이상 뛰었다.

공급량이 늘어나자 휘발유 가격은 내려갔다. 2016년에는 주유소 간 판매 경쟁이 격화돼 갤런당 0.47달러에 휘발유를 판매하는 주유소까지 등장했다. 휘발유 가격이 안정되면서 미국의 소비자들은 차량 구매 시 연비를 최우선 순위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기름 먹는 장사인 ‘허머 H 시리즈’가 미국에서 인기리에 팔릴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대개 SUV는 비슷한 크기의 일반 승용차보다 연비소비량이 많다.

2018년을 기준으로 미국 승용차 판매량은 35%, 트럭을 포함한 SUV 판매량은 65%를 기록했다. 시장조사업체 LMC 오토모티브는 오는 2022년 미국 자동차 시장의 73%가 SUV·크로스오버·픽업트럭 등 유틸리티 차량이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완성차 업계가 주도한 SUV 트렌드?

세계적인 SUV 트렌드는 자동차 제조회사가 가장 바라는 일이다. SUV가 자동차 시장 트렌드로 떠오르기 이전 자동차 제조사들은 차량을 개발할 때마다 시장에 따라 다른 소비자 취향을 맞추기 위해 고민해왔다. 지역별로 서로 다른 수요를 맞출 수 있는 차를 개발하는 것은 자동차 제조사들의 숙명이었다. 예를 들어 포드는 영국과 미국 시장에 베스트셀링 모델을 판매하고 있지만, 영국에선 소형 해치백 피에스타, 미국은 픽업트럭인 F-150이 인기다. 전혀 다른 시장 성격을 보인다.

세계 시장이 하나의 트렌드로 묶인다면 자동차를 생산하는 입장에서 이만큼 편한 것이 없다. 전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판매를 하는 만큼 생산 대수를 크게 늘리고, 차량 개발비나 금융 비용, 부품생산 비용에 대한 부담도 크게 줄어든다.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동차 제조사들은 비용 우위를 점하기 위해 SUV 트렌드를 유지하려고 공급량을 꾸준히 늘려왔다. 미국인이 픽업트럭을 단념하진 않을 것이고, 반대로 유럽인들이 픽업트럭을 즐겨 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SUV는 크기와 유형이 달라도 전 세계의 도시와 도로에서 흔한 존재로 만들어 두 가지의 성격을 교차하도록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SUV 인기가 줄어들 기색도 없다는 점이 장점이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과다경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SUV에 주력하는 이유다.

▲ 포드 SUV '에코스포츠'. 사진=포드

사실 SUV는 제조사의 수익 면에서도 상당히 유리하다. 이러다 보니 완성차 업체들은 SUV 라인업을 늘리면서 공급량도 늘렸다. 대표적인 예가 포드의 콤팩트 SUV인 ‘에코스포츠’다. 이 차의 판매 가격이 약 2만달러다. 여기에 옵션이 더해지면 가격은 1.5배 가까이 상승한다. 이를 통해 얻는 수익은 상당해서 에코스포츠 한 대를 판매하여 얻는 이익이 피에스타 판매 수익보다 4500달러가 높다. 준중형 해치백인 포커스와 비교해도 2500달러가 높다. 이는 포드가 직접 밝힌 내용이다.

포드는 앞으로 전동화와 자율주행 기술 개발 등에 많은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데, SUV 판매가 호조를 보이면서 자금 투자를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소형과 중형 승용차는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 포드는 이미 피에스타의 미국 내 생산을 중단할 것을 밝혔고, 쉐보레 역시 소닉(국내명 아베오)과 크루즈 해치백, 임팔라의 생산 종료를 저울질하고 있다. 크루즈는 미국 로즈타운에서 생산된 모델을 끝으로 최종 단종 수순을 밟았다.

현대차그룹 역시 SUV 라인업을 확대하며 ‘터닝 포인트’를 마련했다. 현대차는 6월부터 신형 싼타페를 미국 공장에서 생산해 7월 8275대 판매된 이후 8월 1만1347대의 실적을 올렸다. 현대차는 싼타페 신차효과에 힘입어 전년과 비교해 2.13% 늘어난 67만9127대를 지난해 팔아치웠다. 기아차도 승부수를 띄웠다. 북미지역에서 연간 10만대 이상 팔리는 쏘울의 변신을 주도했다. 이번에 공개된 쏘울 부스터는 3세대 모델이다. 1, 2세대가 MPV에 속했던 것과 달리 실용성과 기능성을 더해져 SUV로 장르를 변경한 것이 특징이다. 쏘울 부스터는 SUV에 초점을 맞추면서 너비를 제외한 차체 크기가 5~55㎜ 커졌다.

국내 시장 ‘가솔린 SUV’ 인기

국내 시장 역시 SUV 수요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최근 현대차 팰리세이드의 돌풍과 쌍용자동차의 월별 실적 개선 연전연승을 보면 SUV 수요가 충분히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럭셔리 SUV인 포르쉐 카이엔은 지난 2월 498대가 팔리면서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수요가 늘자 완성차 업체들은 신차를 국내시장에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 SUV시장은 글로벌 시장과 조금 다르다. 가솔린 SUV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SUV=디젤’이라는 공식이 성립했다. 가솔린 SUV는 연비가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외면을 받아왔다. ‘기름 먹는 하마’로 취급당하면서 국내 소비자들이 SUV에 휘발유를 넣는다는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무거운 차체에 세단과 동일한 가솔린 동력계를 얹으니 힘이 모자라고 연비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인식은 SUV시장이 커지면서 달라졌다. 완성차 업체들이 기술력을 투입한 파워트레인이 속속 등장하면서 효율이 개선됐다. 차체는 커졌지만 경량화에 집중하면서 무게는 오히려 가벼워졌다. 자연스럽게 세단 못지않은 주행감과 연비를 확보하게 됐다. 가솔린 특유의 부드러운 엔진 회전질감을 SUV에서 느끼게 됐다. 세단 못지않은 주행감과 연비는 덤이다. 동일 사양의 디젤 모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덕에 중소형 SUV 위주로 가솔린 SUV가 주목받았다.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여파까지 커지면서 가솔린 SUV 시장은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 르노삼성자동차 중형 SUV 'QM6'. 사진=르노삼성자동차

국산 가솔린 SUV는 르노삼성 QM6가 맡고 있다. QM6 가솔린 모델 판매 비중은 80%가 넘는다. 매달 3000대 이상 팔리면서 국내 가솔린 SUV 판매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디젤 모델보다 270만원 저렴하면서도 3000만원 내외의 합리적인 가격과 디자인이 인기의 비결이다. 특히 리터당 11.7㎞로 체급이 낮은 현대차 투싼, 쌍용차 티볼리 가솔린 모델보다 연비가 높다.

수입 가솔린 SUV는 각축전이다. 디젤 SUV는 독일차가 대세였다면 가솔린은 일본차가 맡고 있다. 포드 중형 트럭 레인저, BMW X7, 쉐보레 블레이저 등 독일과 미국의 디젤 SUV 모델들이 올해 국내시장에 등장할 전망이다. 일본 브랜드인 닛산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중형 SUV 엑스트레일 가솔린 모델을 국내 시장에 내놨다. 혼다는 혼다 센싱을 장착한 CR-V를, 토요타는 UX 가솔린 모델의 출격 채비를 마쳤다.

박재용 한국자동차미래연구소장(이화여대연구 교수)은 “레저에 특화된 이미지에 세단 못지않은 기술력, 넓은 시야와 적재공간 등 팔방미인으로 거듭난 것이 SUV 성장에 주효했다”면서 “당분간 SUV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