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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사랑은 줄리 잉스터·낸시 로페즈 처럼여민선의 골프 뒷담화⑤ LPGA ‘맏언니’들의 후배 사랑과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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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의 은퇴 나이는 운동 종목에 따라 다르다. 스피드가 필수인 종목의 운동선수들은 20대 중 후반에 은퇴하고 체조선수나 스케이팅 선수들은 그 보다 좀더 더 빠르게 필드를 떠난다. 하지만 골프는 그런 종목에 비하면 은퇴 연령이 늦은 편이다.

아쉬운 것은 한국선수들의 은퇴 연령은 외국 골프 선수들에 비해 훨씬 짧다는 사실이다. 물론 선수층이 미국만큼 두텁거나 연륜이 깊지 않은 것이 이유겠지만 골프라는 운동의 특별함이 유독 한국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점에서 미국투어에서 아직도 활동 중인 노장의 대표선수 줄리 잉스터 선수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녀는 한국 나이로 52세를 넘긴 노장선수다. 이미 아마추어부터 1인자로 올라 여자 아마리그를 평정했고, 1983년 미국 여자프로협회에 발을 내디뎌 지금까지 현역에서 뛰고 있는 그야말로 대단한 선수다. 줄리 잉스터는 1984년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린 여장부다.

골프계의 대모 낸시 로페즈 선수는 1957년생으로 한국 나이로는 55세다. 그녀는 협회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힘을 지녔는데 힘의 원천은 바로 팬들이었다. 실제로 낸시 로페즈 선수와 같이 시합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당시 같은 팀의 동반자로 라운딩을 하면서 골프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수많은 팬들이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응원을 하는 모습에 놀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요즘에는 특별히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의 인기는 여전히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높기만 하다. 오랜 기간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쌓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인기의 진짜 이유를 알게됐다. 줄리 잉스터는 실제로 매우 인간적이고 솔직하며 정의로워 선수들이 실수를 할 때면 여지없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선배로서나 큰언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울러 인생 선배로서의 여러 경험을 들려주는 멘토 구실까지 했다. 미국 골프전문지 <골프 포 우먼>에서 그녀가 과거 미셸 위 선수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녀는 당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미셸 위에게 남자 시합에 나가 남자들과 성(性)대결을 하라고 누가 충고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자는 절대로 남자시합에서 우승을 할 수 없다. 세계적인 선수 아니카 소렌스탐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여자와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퍼팅과 칩샷에 매우 훌륭한 터치가 있다. 만약 내 딸이 남자시합에 출전한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히 말릴 것이다.”

여기서 나는 세 가지를 느꼈다. 첫 번째는 낸시 로페즈 선수이기에 이런 충고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골프선수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 라운딩을 즐겨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골프를 즐기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한국에서 노장선수를 많이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낸시 로페즈 선수는 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실제 시합 때마다 그녀의 아버지가 늘 따라다니곤 했다). “아버지는 내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선택의 자유를 주셨고 내 결정을 늘 따라주셨다. 내가 원했다면 15~16세에 나는 프로로 데뷔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내게 돈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셨고, 덕분에 나는 내 어린 시절을 평범한 여느 아이들처럼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서 나는 우리와 그들의 또 다른 차이를 확 느끼게 된다. 한국에서 선수로 지낸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학교수업, 학교 친구, 또 추억을 만들어낼 시간 등이 일체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운동선수로서 해야 할 것들로 모든 스케줄이 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누구보다 빨리 프로로 진출해 선수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다시 리그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한결같이 비슷하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긋지긋하다.” 실제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선수가 은퇴를 한 후 단 한 번도 수영장을 찾지 않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왜 한 번도 수영장에 가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 선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물이 싫어요"라고.

내 주변의 은퇴한 골프선수들 역시 놀랍게도 똑같은 말들을 한다. 골프 클럽 잡은 지 정말 오래 됐다고. 심지어 클럽도 없는 친구마저 있다. 얼마나 지겨웠을까? 단 한번 만이라도 골프를 즐기면서 혹은 기쁘게 친 기억은 없었는지 한때는 프로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들에게 묻고 싶다. 선수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고된 훈련 후 프로로 전향해 또 다른 세계에 발 디딜 때 빨리 돈 벌어 은퇴를 생각했다면 선수생활은 짧게 끝날 수밖에 없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나만 봐도 학창시절 친구가 없다.

그 이유는 운동하느라 친구의 얼굴을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렇게 숨차게 마치 내몰리듯이 프로세계에 빨리 입문한 것이 옳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미국에서 줄리 잉스터. 낸시 로페즈 등의 선수들과 시합을 할 때 그들의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와 엄마를 응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 기억으로는 줄리 잉스터의 딸이 두명 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가족들이 모두 오려면 돈이 많이 들겠다”고 그녀에게 농담을 건넨 적이 있다.

그 때 줄리 잉스터 선수가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다. “맞다. 돈이 많이 든다. 하지만 골프라는 운동 전에 내게는 가족이 있고 행복이 있고 그것이 나를 아직까지 시합장에 나서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일년 내내 모든 시합을 따라다니는 선수. 부상을 입어도 계속 출전을 하는 선수도 있지만 일 년에 반 정도의 시합만 참가하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선수도 있다. 일 년 내내 시합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적을 유지하려면 모든 시합에 출전해야 한다"고. 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이렇게 말한다. "골프를 잘 치고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반만 참가한다"고. 그들의 생각은 이처럼 다르다. 물론 나는 양쪽을 모두 이해한다.

나 역시 일년 내내 시합을 따라다닌 선수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결과는 확실하게 드러난다. 후자를 택할 때는 선수 생명이 길어진다. 시합 중에 알까기. 언성 높여 싸우기. 선수들 부모끼리 싸우기 등 이런 상황 속에서 선수들은 골프를 즐기려야 즐길 수가 없다. 푸른 잔디를 보고 밟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코스 한가운데로 공을 날리는 이 신나는 운동을 오래 할 수 있는 비결은 역시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에너지가 충전되고 그 에너지가 가족과 친구. 그리고 팬들까지 전달되는 시너지 효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한국에서 뛰고 있는 주니어 선수들도 당장 코 앞의 결과 보다는 조금 멀리 보는 여유를 갖기를 바란다. 그들이 프로가 돼서도 라운딩 내내 자연을 만끽하며,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는 '행복한 골퍼'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여민선 프로 minnywear@gmail.com
LPGA멤버, KLPGA정회원, 자생 웰니스센터 ‘더 제이’ 헤드프로, 방송인




이코노믹리뷰  |  econo@econovill.com  |  승인 2011.12.08  21: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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