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곧 삶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삶 가운데에서 하는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속한 삶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가령, 천국 혹은 지옥 따위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내가 지금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사후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전제를 두곤 한다. 지금과는 무관하게만 느껴지는 사후 세계를 떠올리는 일조차 결국은 삶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세계 혹은 그 경계에 관한 생각은 삶에 관한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우리가 흔히 그러하듯 죽음을 삶의 최종 과정이라 정의할 경우에 더욱 자명해진다. 인생을 한 편의 소설로 정의해보자. (소설은 대개 실존했거나 허구인 한 사람의 삶의 전체 혹은 일부를 서술한 경우가 많으므로 꽤 그럴듯한 비유가 될 만 하다.) 우리는 소설의 결말을 그 소설의 일부로 여기지 이를 결코 소설에 딸려 있는 작가의 말이나 어느 명사의 추천사로 여기진 않는다. 소설의 끝은 누가 무어라 말해도 소설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삶의 끝인 죽음을 생각하는 일 역시 삶의 일부를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그 죽음의 형태나 방식에 관한 것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시진핑 국가주석도, 이재용 부회장도 선택하지 못한 ‘태어남’과 달리, 죽음은 선택이 가능하다. 여기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당장 당신이 자살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 즉 삶의 순간순간을 선택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순간 당신 스스로 혹은 그 이후 당신에게 주어질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삶을 이해한 사람은 대개 죽음에 대해서도 일정 이상 수준의 이해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죽음은 내 삶의 일부이며, 어쩌면 그 삶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재밌어지기 시작한 드라마가 갑자기 방송사 사정으로 남녀 주인공을 모두 교통사고로 죽인 뒤 종영해 버렸다고 생각해보라. 혹은 한참 잘 나가던 드라마가 마지막 회에 와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다 꿈이었다고 결론 지어 버린다면? 이처럼 죽음이라는 마지막 과정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올바른 선택 혹은 좋은 결과물을 얻어내지 못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가 삶, 즉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죽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는 세상에 내던져진 상태다. 자신의 의도나 선택과는 관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의미다. 때문에 인간은 살아가는 내내 ‘나는 왜 여기 살고 있을까?’, ‘내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 없이 던지게 되며, 그 결과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될 것이고 유한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재구성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다.

김영민 교수는 자신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가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음의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결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 온 사태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의 글 속에서 죽음이란 주제는 다양한 변주를 이룬다. 그에게 죽음이란 자신의 삶이 가지는 의미를 찾게 해주는 기제에 해당하며, 공동체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때로는 공부의 진짜 의미를 재확인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음의 의미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제대로 죽기 위해 사는가? 아마도 이 질문에는 어느 누구도 완전한 답을 내릴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각자의 삶이 다른 것처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도, 죽음을 향해 가는 태도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다름 사이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아가기 위해서도 끊임 없이 자신의 죽음과 공동체의 죽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아침이 아니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