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에 한량으로 이름났던 유방이 어찌어찌 황제가 되었다. 사실 어찌어찌라는 속에는 초한지 10권만큼의 내용이 있을 정도로 쉽지 않는 고난의 행군 끝에 이룬 것이긴 하다. 황제가 된 뒤로 개국공신이자 유명한 유학자인 육가(陸賈)라는 신하가 늘 그의 귀에 대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읊어댔다. 그러자 유방이 버럭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다.

“천하는 내가 말 위에서 얻은 것인데 왜 빌어먹을 글귀 따위를 지껄이는 것이냐?”

“말 위에서 얻은 것을 역시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습니까?”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천하를 얻는 것은 무력에 의지하여 가능했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무력이 아닌 권력을 통해서다. 그래서 유방과 그의 아들들은 한번도 유가였던 적이 없었지만, 유가를 통치의 근본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중국 역사가 제대로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없었던 최초 인류는 가져야 할 것이 무력 밖에 없었다. 주먹 세고 칼 잘 쓰는 자가 땅과 가축과 여자와 명예를 소유했다. 이른바 ‘무력사회”였다. 사회가 진화하면서 칼 대신 뭔가를 쥐어야 했다. 어떤 이는 주판을 쥐었다. 상업민족이다. 자유무역을 주장하며 자금을 통해 지배력을 펼쳤다. ‘재력사회’이자 자본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권력의 지팡이를 들었다. 그 권력의 힘으로 사람들 간의 관계와 몫을 결정했다. 천하는 무력을 바탕으로 쟁취했지만, 권력의 지팡이를 통해 통치했으며 그 정점이 한무제 때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유가의 경서들이 들려있었다.

대학을 너무 오래 다녀서, 입학은 80년대 후반이었지만 졸업이 하필이면 IMF 직전 암울했던 시기였다. 선배나 동기들은 대충 원서만 써서 내면 유명 대기업에도 척척 들어갔는데, 막상 내가 하려니 각 과는커녕 단과대까지 내려온 원서도 거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학원 강사로 주경야독하면서 여기저기 시험도 다녔지만 쉽지 않았다. 속이 타 들어가고 가만히 있어도 부화가 치밀었다. ‘자기는 초졸이면서 왜 지금 뽑는 신입들은 SKY만 뽑는 건지’하는 원망이 저절로 나왔다.

 

기업문화가 곧 시스템이요 경쟁력의 근간

세상이 예전이나 늘 똑 같이만 굴러간다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CEO가 그 자리에 오기까지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은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금수저라면 모를까 자수성가해서 어느 정도 이상 규모를 갖춘 CEO라면 누구에게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스토리가 있다. 오랜 경험과 산전수전의 고통을 감내해왔다. 그런데 경영 환경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는다면, 과거에 그의 성공을 이끌었던 `개인적인 성공 방정식` 그대로 조직을 이끌어도 회사는 위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갈수록 불확실성이 높아진다. 그 옛날 CEO가 혼자서 갈고 닦은 옛 경험과 지혜가 늘 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CEO 자신은 이 같은 사실을 모를 때가 많다. 예전엔 100원짜리 빵 백 개 정도를 팔기 위해서 하던 방식이 지금 1,000원짜리 만개를 파는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 빵 백 개를 올려 놓을 매대와 거슬러 줄 동전을 담은 끈이 튼튼한 전대가 지금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옆에서 이런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은 잘 없다. 오히려 CEO가 `정보의 진공 상태`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무거운 동전이 가득 들어 있는 전대를 차고 매대를 지키고만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님에도,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지시와 방향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신상품개발이나 마케팅 전략을 진두지휘하기도 하지만 번번히 소득 없는 삽질로 끝이 난다. 자신이 말 타고 성공했으니, 지금도 말 타고 다니면 성공하리라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자신이 지휘한 전략이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은 항상 뒤 늦게 알게 된다. 그의 주변에서 진실을 계속 말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사의 말단 사원을 비롯해 모두가 아는 진실을 CEO 그 자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말을 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올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말에서 내릴 생각조차 없다. 직원들은 일을 부지런히 하기 보다는 ‘일을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데’만 집중하게 된다.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면서 중간 중간 잘 보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를 위한 시간에만 공을 들이고, 적절한 시점에 또 다른 보고서를 들이밀며 종전의 보고 내용은 흐지부지 흘려 보내 버린다. 열심히 하는 척만 하면 되지, 굳이 피땀 흘려가면서 뒷수습을 할 필요는 없다. 잘 포장하고 그럴싸한 말로 장밋빛만 보여주며 인정을 받는다. 승진과 보너스를 얻으면 그 뿐이다.

그럴 때, 진실을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된다. 가짜 신호라는 사실을 CEO가 알기라도 하면, 조직의 기반이 송두리째 뒤집어질 수도 있다. 진실을 말하는 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된다. 쥐 중에서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양이 목에 방을 달고 싶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방울을 다는 순간, 그가 첫 번째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다. 최소한의 조직 문화와 시스템을 조성해놓지 못한 기업 조직이 범할 법한 내용이다. 아직도 말에서 내릴 생각을 못하고 말 위에서 힘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장수의 말로다.

이런 조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쥐는 쥐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진실에 눈 감고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굳이 진실을 알아봐야 마음만 아플 뿐이다. 조직에서 인정 받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말 타고 있는 CEO에게 ‘말에서 내려 현실을 바로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말을 타고 있으라’는 소리를 해야 한다. 그게 조직에서 인정 받는 길이고 CEO가 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는 것 보다, 하다가 마는 것이 나은 현실

‘실패를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것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는 말이 있다. 또, ‘성공이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실패하는 것이다’는 말도 기억하고 싶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실패하면서 배우고 커 나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직은 ‘실패해 보라’고 하지만 ‘절대로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발이 공중에 떠 있는 CEO에게 잘 보이는 방법은 ‘거창하게 시작하고, 실패하기 전에 하다가 마는 것’이다. CEO와 한통속이 되는 길이다. 뒷감당은 관심 없고, CEO에게 신호만 계속 보내면 그만이다.

신호를 보내기 위해 회의를 계속하고, 보고서를 계속 만들고, 미사여구와 장황한 논리를 붙여서 그 속에 푹 빠져 지내면 된다. 몸도 마음도 편해진다. 어차피 시작만 거창하게 하다가 하지도 않을 일, 시작한 일이 복잡해지고 문제가 될 소지가 생겨날 즈음엔 또 다른 거창한 일들로 신호를 보내면 그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들은 점점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를 해결할 진짜 해결책은 찾을 생각이 없고, 실속 없이 분주하기만 할 뿐이다.

예전에 있었던 일인데, 각 팀간 협업은커녕 갈등과 반목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각 팀에서 진행하고자 하는 일들이 실질적인 시행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어서, CEO가 참석한 회의석상에서는 그럴싸한 얘기들로 포장이 되었지만, 사실은 어느 것 하나도 실효를 거둔 것이 없었다. 때문에 잘 된 것은 자기 팀 덕분이고, 잘 못된 것은 다른 팀들 때문이라는 지적만 횡행했다. 그러니 다른 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잘 되기를 바라고 협조하려는 생각보다는 문제가 생겨서 CEO에게 지적당하기만을 서로 바라고 있었다.

임원부터 신입사원까지 오로지 자신의 팀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골몰했다. 그러다 보니 외부 기관과의 급한 계약 건으로 날인을 요청해도 날인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며 며칠씩 기다리게 했고, 그러다 계약이 파기되면 자기들은 ‘회사 규정대로 했다’며 발뺌했다.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서려고 했더니만, 오히려 쓸데 없는 간섭으로 보고가 되어 중재 의도조차 왜곡되기 일쑤였다. 어렵사리 이런 저런 상황을 만들어서 넌지시 보고를 했고 실마리를 풀기 위해 자리를 만들었다. 문제가 비단 그 양쪽 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사적인 것이었으나, 일단 발단이 된 그 두 팀의 장을 CEO가 불러 모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신뢰부터 회복해야 함을 전달했는데, 그 다음이 더 경악스러웠다.

“내가 사이 좋게 서로 도와가며 일 하라고 했어, 안 했어?”

“……..”

“니들이 사이 좋게 일을 하지 않으니, 내가 쓸데 없는 얘기까지 들어야 하는 거 아냐?”

“……..”

그 광경을 보고 나서는 팀간의 신뢰며 중재며 화합에 대해 두 번 다시는 생각해본 바가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는 그나마도 꼬마 아이의 지적에 왕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기라도 했다. 하지만 현실 곳곳에선 벌거벗었음을 알리는 지적에 ‘내가 그런 지적까지 받아야 하냐?’고 입 닫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