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맞아 그간 바쁘던 가족이 모처럼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가까운 데로 외출을 할까 하다가 여전히 공기가 나빠 포기하고,

집에서 약식으로 파티를 즐겼습니다. 맛있는 것 먹고, 디저트도 즐기고,

밀린 얘기도 오래 나누었습니다. 그러고 아파트나 한 바퀴 산책할 요량으로 집을 나서려는데,

아들이 극구 말리는 겁니다. 터널 속 같은 밖을 왜 나가느냐며,

나쁜 공기에 무심한 아빠가 자기 얘기를 안 들어주어서, 암 걸리겠다고 투덜거리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어른들이 젊은이들 말을 잘 안 들어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를 이르는 신종 용어라 하더군요.

마스크를 챙겨 쓰고, 암 걸리지 말라고 얘기주고 집을 나서는데 뒷골이 땡겼습니다.

이런 풍경에 집 사람만 빙긋이 웃는 모습였습니다.

예전에 가족을 태우고 운전하는데, 버스나 트럭 뒤를 따라 갈라치면 황급히 문을 닫았습니다.

아내가 부엌에서 가스를 쓰면 꼭 문을 열었고. 또 아무리 추워도 겨울에 환기시킨다고

문을 활짝 열어 눈총을 받았습니다.

이런 나를 보며 집사람과 아이들이 강박이라고 잔소리를 했는데,

이제 아들이 한 수를 더 두고 있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꼭 청정기가 켜져 있는지 확인하고,

공기가 나쁘면 절대 문을 안 열고, 아침마다 현관에 마스크를 가족 수만큼 챙겨 놓아두고,

마스크 제대로 쓰는 법을 설명하고.. 아들이 어느새 우리 집 공기 질 관리를 포함한

건강 관리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빙긋이 웃은 이유는 역전을 말함일까요?

아니면 오래 기다려온 세월의 힘을 보여주는 걸까요?

3월이라는 계절에 서니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는 조카들도 생각됩니다.

어릴 때 부모가 말을 안 들어주면 사람들이 지켜보는 것 아랑곳 하지 않고,

뒤로 발랑 누워 악을 쓰던 조카가 생각납니다. 뒤로 하도 격하게 누워서 지켜보던 우리도

위험하게 생각했을 정도니 쩔쩔매던 누님 내외분은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그 조카가 대학원 졸업했다고 논문 들고 찾아뵙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우리는 머리가 깨질 것을 걱정했다고 농담했더니, 깔깔거리며 그 시기는 잘 넘어가고,

논문 쓰느라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고 얘기를 받는 조카로 성장했습니다.

또 다른 조카도 생각납니다. 사촌 동생의 아들인데, 초등생 시절에 부모의 통제와

학원 돌림에 지쳐 이미 인생이 고달프다고 해서 웃픈 현실을 같이 걱정했던 조카였습니다.

그 녀석 또한 잘 커서 이제 과학고 들어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의 조카들 또한 흘러간 세월이 만든 걸까요?

최근 생활습관을 하나 바꾸었습니다.

아침에 알람을 세 번 정도 듣고 일어나는데, 최근부터 첫 알람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 알람의 소음이 심장에 무리를 주니, 알람을 다시 하지 말고,

첫 알람에 일어나라는 겁니다. 그것에 공감해 즉각 따라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필요함을 인식하니 움직이게 되는 것!

그것을 아는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조카들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고, 또 있어야겠지요.

‘오래 기다렸습니다!’ 겨울을 넘어온 봄이 건네주는 편지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