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화려한 집무실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우하는 일반적인 재계 총수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있다. 2019년 현재 대한민국의 재계는 실용을 추구하며 소탈함을 무기로 삼고, 때로는 파격에 가까운 스킨십으로 다가서는 리더십이 각광을 받고 있다. 한진가의 '갑질'은 전혀 다른 나라 이야기다.

▲ 삼성전자 스타트업 컬처혁신 선포식이 열리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실용과 無격식..이재용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키워드는 소탈함, 그리고 실용주의다. 이건희 회장 와병 후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이 부회장은 연이은 인수합병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빠르고 기민한 조직 운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 3월 스타트업(Start Up) 삼성 컬처혁신이다. 삼성전자는 당시 주요 사업부장, 임직원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스타트업 컬처혁신 선포식을 열었으며 이 과정을 사내방송으로 실시간 중계했다.

당시 스타트업 컬처혁신 선포식은 이건희 회장 주도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는 평가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주요 임직원들을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이 회장 중심의 회의를 주재하는 방식으로 시작됐다면, 이재용 부회장의 스타트업 삼성은 철저하게 임직원 중심으로 전개됐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의 '하달'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의 '비전'이 가장 큰 특징이다. 당시 선포식에 이재용 부회장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다.

이 부회장은 업무에 있어 치밀하고 군형감있는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이 과정에서 제왕적 경영 마인드를 걷어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삼성 고위 관계자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업무 지시가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지만, 큰 방향성이 정해지면 나머지는 아래 사람에게 일임하는 것이 이 부회장의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소탈함도 이 부회장의 무기다. 삼성 실무자급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해외출장을 가면서도 수행원을 거의 데리고 가지 않거나, 자기의 짐을 직접 들고 이동한다"면서 "처음에는 삼성 직원인 나도 거의 믿지 않았는데 실제로 이 부회장의 해외출장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수행원을 우루루 몰고 다니며 세를 과시했던 예전 재계 회장들 분위기는 확실히 아니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전자의 고위급 경영진들도 공식 행사에서는 별도의 수행을 두지 않고 움직이는 등, 전반적인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일부 재계 인사들은 스스로를 갑(甲)족으로 여기며 일반인들과 거리를 두지만, 이 부회장은 그렇지 않다. 이동하면서 이 부회장을 알아본 누군가가 다가오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함께 셀카도 찍는다. 야구장 일화가 회자되는 이유다. 이 부회장은 상무보 시절인 2004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에서 김응룡 감독과 악수를 나눈 것을 시작으로 자주 야구장에 등장해 일반 시민들과도 어울렸다. 최근에는 한 남자가 이 부회장을 알아보고 다가오자 경비원이 막아섰는데, 이 부회장이 스스럼없이 다가가 함께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사진에 촬영되기도 했다.

지난해 인공지능 유학길에 오른 이 부회장은 캐나다에서 요리연구가 아키라 백과 우연히 만났고, 그와 기념사진을 촬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른 현지 교민의 인스타그램에서 공개된 이 부회장의 사진을 보면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다소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다.

▲ 이재용 부회장과 요리 연구가 아키라 백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인스타그램 갈무리

구내식당에도 나타났다. 이 부회장은 지난 1월 3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아 고동진 IM부문 대표이사 사장, 노희찬 경영지원실장 사장, 전경훈 네트워크사업부장(부사장) 등 경영진들과 구내식당을 이용하며 직원들과 어울렸다. 이 부회장은 직원들의 셀카 제안에 흔쾌히 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8월 화성 사업장에서도 고위 정부 당국자와 구내식당을 이용한 후 현장의 직원들과 일일히 악수해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신남방정책, 대북 경협 사업 등을 추진하며 삼성전자의 역할론에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이 부회장은 말 그대로 민간 경제 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행보의 기저에는 이 부회장 특유의 소탈함과 실용주의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가치속으로...최태원 회장
최태원 SK 회장은 재계 총수들 중 사실상 맏형 역할을 수행하며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정계와 재계의 만남이 있을 경우 전면에 나서 특유의 친화력으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정면돌파를 좋아하고 선 굵은 경영을 지향하기 때문에 다소 마초적인 이미지도 강하다.

마초 최태원 회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회적 경영이다.

▲ 최태원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출처=SK

최태원 SK 회장은 1월 2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2019 신년회에 참석,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도 더 큰 행복을 만들어 사회와 함께 하자고 강조했다. 이날 신년회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고 주요 관계사 CEO가 패널로 참여해 대담한 뒤 최 회장이 마무리 발언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대담 사회를 맡았고,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 김철 SK케미칼 사장, 박상규 SK네트웍스 사장 등이 패널로 참여했다.

최 회장은 행복이라는 화두를 꺼냈다. 최근 친족 등에게 지분을 증여하며 공동경영 체제를 확립한 상태에서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장면이 의미있다.

최 회장은 "회사의 제도 기준을 관리에서 행복으로 바꿔야 하며 단순히 제도만 만들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시행과 적극적 참여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면서 "KPI의 SV 비중을 50%까지 늘릴 것이며 완벽한 평가가 되지 못할 지라도 평가를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도 빛을 발했다. 한스 파울 뷔르크너(Hans-Paul Burkner) 보스턴 컨설팅 그룹 회장 외에 조 캐저(Joe Kaeser) 지멘스 회장, 조지 세라핌(George Serafeim)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 및 캐빈 루(Kevin Lu) 파트너스 그룹 아시아 대표 등이 패널로 나선 가운데 '기업가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Shedding light on the hidden value of business)' 세션에서 최 회장은 "측정과 보상 시스템을 도입하니 사회적 기업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더 정확히 인식했고 몰입도를 높여 지속가능성을 강화하는 효과가 나타났다”면서 “이런 효과에 주목해 SK계열사들도 기존 재무성과에 더해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고 관리하는 더블 보텀 라인(DBL)을 도입했고, 사회적 가치 측정값을 핵심성과지표에 반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혼자 잘 생존하는 것보다,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사회적 가치라는 거대 패러다임으로 묶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공유 플랫폼의 확대와 ICT 기술과의 시너지로 귀결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조직 운영에 있어 사회적 가치에서 보여준 유연한 감각을 보여주는 가운데, 최 회장은 소통 행보에도 빠르게 나서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1월 8일 서울 종로구 서린사옥에서 구성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SK이노베이션 등 서린사옥 내 구성원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스스로 컬러풀한 줄무니 양말을 선보이며 “이렇게 양말 하나만 변화를 줘도 주변에서 뭐라 할 수는 있겠으나, 본인 스스로 행복 창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추진해달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회장님의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제 워라밸은 꽝”이라고 답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기업의 성공을 사회의 성공으로 과감하게 끌어내는 결단력, 여기에 격의없는 소통을 무기로 기존의 선 굵은 경영을 돋보이게 만드는 전략은 최 회장이기에 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 최태원 회장이 소통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출처=SK

파격의 연속..정의선 부회장
최근 현대자동차의 위기가 계속되고 있으나, 최소한 정의선 부회장이 주도하고 있는 새로운 경영 혁신은 재계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정 부회장은 올해 초 수소위원회 공동회장에 취임해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한편, 최근에는 근무복 자율화에 나서 눈길을 끈다.

현대는 전통적으로 딱딱한 기업문화를 가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임직원 복장 완전 자율화를 시작으로 조직의 경직성을 깨트리고 수평적 경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다. 현대차는 앞서 연구소와 국내영업본부 등 일부 부서에서 부분적으로 자율복장제를 시행했고 2017년에는 금요일마다 자율복장으로 일할 수 있는 ‘캐주얼 데이’도 도입한 바 있다.

정 부회장이 주도한 임직원 복장 완전 자율화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4일 오전부터 전면 관련 제도가 도입된 가운데 직원들은 어색해하면서도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 부회장이 먼저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소형SUV 코나 월드프리미어에서 차량 설명을 진행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직원들은 자신을 옥죄던 넥타이에서 벗어나 의외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분위기다.

자율복장 관련 미팅 행사인 타운홀미팅에서 공간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사무실 공간의 유연한 활용과 주차공간 개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온 가운데, 정 부회장이 쏘아올린 신선함은 이제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젊고 강하다...구광모 회장
지난해 그룹의 콘트롤 타워로 부상한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올해 자기가 구상하는 경영 DNA를 빠르게 조직 내부에 체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분위기다.

구 회장은 오랫동안 실무경험을 쌓았으며 평소 소탈하고 편안한 이미지로 구성원들의 신망이 두텁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아 경영감각에는 이견이 갈렸다. 취임 직후 로보스타와 ZKW 지분 인수 등 연구개발, 인수합병 전반을 지휘하며 눈부시게 활약했으나 지난해 7월 중순부터는 다소 정중동의 행보를 보인 지점이 일각의 우려를 산 이유다. 오너가 일원이 이사장을 맡아온 LG연암문화재단, LG연암학원, LG복지재단, LG상록재단 등 LG 재단의 이사장에 비오너 일가인 이문호 전 연암대학교 총장을 영입하는 등 신선한 파격을 보여줬으나 그 뿐이었다.

약간의 우려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 9월, 구 회장은 전격적으로 사이언스 파크를 찾아 강력한 경영 혁신 의지를 보였다. 이후 열린 신년식에서 본격 경영 행보를 시작했다는 평가다. 구 회장은 "(현재) 우리에게는 고객의 자리와 고객 결재란을 두었던 뜨거운 열정이 여전히 가슴 속에 있을까? 혹시 고객을 강조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고객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닐까?"라면서 "지금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의 기본 정신을 다시 깨우고, 더욱 발전시킬 때"라고 말했다.

▲ LG 신년식이 열리고 있다. 출처=LG

구 회장은 LG의 고객 가치는 고객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감동을 주는 것이라며 "고객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하는 LG만의 고객 경험을 선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고객으로부터의 배움을 더 나은 가치로 만들어, 고객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당시 신년회는 구 회장의 소탈함과 소통의 잘 보이는 행사라는 말이 나온다. 새해 모임 시작 전의 상황을 보면, 기존에는 행사장인 트윈타워 강당 앞에서 참석자 모두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이었고 회장단과 사장단이 임원진과 순차적으로 악수하며 새해 인사를 나누던 모습에서 이번에는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의 임직원들이 서로 자유롭게 새해인사를 나누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또 대형 LED 메시지 월을 통해 보여지는 동료들의 새해 희망과 의지를 담은 메시지를 보고, 포토월 앞에서는 기념 사진도 촬영했다.

LG는 "격식을 가능한 배제하고 진지하지만 활기찬 분위기로 진행됐다. 이는 소탈하고 실용주의적인 구 대표의 경영스타일과 맥을 같이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구 회장은 스스로를 회장으로 부르지 않고, 핵심 경영인들을 만나면 깎듯한 예의를 보이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구 회장은 최근 LG그룹이 매년 분기별로 진행하던 정기 임원세미나를 매달 열리는 포럼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정기 임원세미나는 1998년 처음 시작, 회장의 지시사항을 전파하고 명사 초청을 통해 강의를 듣는 방식이었다. 구 회장은 이를 포럼으로 전환시켜 불필요한 회의를 줄이고 사업에 도움이 되는 방향성을 고민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역시 구 회장 특유의 실용주의에 기인한 패러다임이라는 평가다.

▲ 신동빈 회장이 직원들과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갈무리

아직은 어색해도..신동빈 회장 셀카 행렬 동참
국내 유통 재기업 중 신동빈 롯데 회장의 최근 행보도 주목을 받고 있다. 4일 재계에 따르면 신 회장은 롯데타워 구내식당서 식사를 하며 직원들과 셀카를 찍는 등 소통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재계 인사 중에서도 격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롯데물산과 롯데케미칼 직원들 사이에서 심심치않게 '신 회장 구내식당 출몰설'이 일찌감치 화제였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최근 과도한 의전을 배제하고 가벼운 백팩 차림으로 출장을 가는 등 격의없는 소탈행보에도 적극적이다.

4일 공개된 신 회장과 직원들의 사진을 보면 아직은 어색한 기류가 읽힌다. 신 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근엄하고 직원들도 다소 경직되어 있다. 그러나 직원들과 격의없이 만나 함께 하려는 신 회장의 의지만큼은 크다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