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죄집단의 표적인 고액권 지폐 발행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출처= Pixabay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유럽 국가들은 500유로 지폐 발행을 중단했거나 중단할 계획인데 미국의 100달러 지폐 유통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어, 전 세계 범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액권 통화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100달러 지폐는 유통량에 있어서 1달러나 20달러 지폐보다 크게 적었다. 그러나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자료에 따르면, 100달러 지폐 유통량은 금융 위기 이후 두 배나 늘어났다. 2017년에 이미 시중에 풀린 100달러 지폐는 1달러 지폐를 넘어 가장 많이 유통되는 미국 화폐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조폐국은 100달러 지폐를 계속 찍어내고 있어 전문가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도이체방크의 토르스텐 슬로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미국이 100달러 지폐를 마구 찍어내는 것은, 유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에 대한 세계적인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또 한 차례의 금융위기를 걱정하는 미국 가계의 저축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세계 지하경제의 수요 증가에 의해 촉발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찍혀 있는 100달러 지폐는 1969년에 500달러, 1000달러, 5000달러 지폐가 없어진 이후, 미국의 가장 큰 통화 단위이지만 일상적인 거래로는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다. 아틀란타 연방준비은행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평균적으로 현금 60달러 정도를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일상에서 현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미국인이 약 3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디지털 시대에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재무부가 화폐를 찍어내는 이유는 오래되거나 손상된 지폐를 교체하거나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100달러 지폐의 수명은 약 15년으로, 8.5년인 50달러 지폐에 비해 교체 주기가 길어 그렇게 자주 찍어낼 필요도 없다.

게다가 100달러 지폐의 대부분은 미국 내에 있지도 않다. 시카고 연방준비은행의 2018년 연구논문에 따르면, 전 세계에 유통 중인 120억달러(13조5000억원) 상당의 100달러 지폐 중 80%가 해외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같이 해외에 미국 통화가 많이 나가 있는 이유는 불안정한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미국 달러가 자국 통화를 대체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루스 저드슨 이코노미스트는 리치먼드 연방준비은행 2018년 논문에서 “외국 수요 증가는 달러에서만 발생하는 독특한 현상이다. 다른 통화도 본국 밖에서 사용되지만, 달러만큼 그 비중이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100달러 지폐가 그렇게 많이 풀린 한 가지 가능성은, 부패와 범죄가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버드대학교의 모사바르-라흐마니 기업정부연구소(Mossavar-Rahmani Center for Business and Government)는 2016년 논문에서, 고액권 지폐는 익명성에다 거래 기록이 남지 않고 운반하기가 비교적 쉽고 편해, 범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불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스탠다드 차터드(Standard Chartered)의 피터 샌즈 전 최고경영자(CEO)는 하버드 논문에서 범죄자들에게 고액권 지폐가 얼마나 편리한 수단인지를 다음과 같이 극명하게 표현했다.

“20달러 지폐로 100만달러는 50파운드(23㎏) 이상의 무게가 나가지만 500유로 지폐라면 2파운드(900g) 남짓에 불과하다.”

불법 금융을 퇴치하기 위한 정부간 협력기구인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inancial Action Task Force)는 2015년 보고서에서 “정확한 수치는 구할 수 없지만 범죄자들이 매년 세탁하는 현금의 양은 수천억달러에서 1조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달러, 유로화, 영국 파운드, 스위스 프랑 등이 범죄자들이 선호하는 통화들이다.

보고서는 “범죄 자금이 처음에는 전자적 형태(은행 계좌에서 자금을 빼돌리는 등)로 생성돼도, 범죄자들은 감시 추적을 끊기 위해 은행 계좌에서 자금을 현금으로 인출해 다른 나라로 운송한 뒤 다른 계좌에 입금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현지에서 마약을 판매해 벌어들인 자금이 주로 애틀랜타, 보스턴, 시카고,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대도시의 중앙집계소로 흘러 들어가고, 이곳에서 수표가 50달러와 100달러 지폐로 전환된 다음 진공 밀봉해 부피를 줄인다는 것이다.

돈세탁에 대한 은행 통제가 강화될수록 범죄자들은 현금에 더 의존하게 된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유럽 국가들이 500유로(575달러) 지폐 발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이런 주장들 때문이다. 500유로 지폐는 한때, 테러 자금 지원과 돈세탁에 사용되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빈 라덴 수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에 따라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각지에서 고액권 지폐를 없애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부장관은 WP에 보낸 100달러 지폐 폐기를 주장하는 기고문에서 “고액권 발행을 중단하기로 한 글로벌 합의는 글로벌 금융권이 ‘큰 손’들의 편이 아니라 일반 시민의 이익 편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법을 준수하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여전히 현금에 의존한다. 2015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은행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한 사람들이 20억명이나 되며, 이들에게 현금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다.

100달러 지폐가 그렇게 많이 풀린 것은 일부 사람들이 재정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그들의 자산을 금융시스템 밖에 두려고 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한 때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 화폐의 열풍이 분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다.

올 들어 미국과 글로벌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최근 전 세계 800여명의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019년의 최대의 걱정거리로 글로벌 경제 침체가 꼽혔다.

그러나 현재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서머스 전 장관은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가 100달러 지폐에 대한 수요를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위기를 우려해 이를 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100달러짜리 고액권을 사재기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고액권은 세금을 피하고 싶거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위한 부의 보고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고액권을 계속 찍어내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유럽이 500유로짜리 지폐를 없앴기 때문에 미국 100달러 지폐에 대한 수요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