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동규 기자]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3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 박 명예회장은 1932년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자원해서 해군에 입대해 용사로 활약했다. 군 제대 후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 1960년 한국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1968년 한양식품 독산동장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코카콜라를 둘러보고 있다. 출처=두산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두산그룹에 발을 들였고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친 뒤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항상 주변을 아우르는 ‘큰 어른’이었던 고인은 인화를 중심에 두고 인재를 중시한 경영으로 오늘날 ‘글로벌 두산’의 기틀을 닦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 씨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5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발인과 영결식은 7일이며,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경청의 리더십 보여준 ‘침묵의 거인’...한국전쟁도 참전

고인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었지만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자신의 뜻을 짧고 간결하게 전했다. 사업적 결단의 순간 때도 그는 실무진의 의견을 먼저 경청했고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어 방향을 정했다.

한 번 일을 맡기면 상대방을 신뢰하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한 고인에 대해 두산 직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고, 다른 이의 의견을 먼저 듣고 존중하던 ‘침묵의 거인’이셨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큰 어른이셨다”고 말한다.

고인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군에 자원 입대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상황임에도 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것이다. 그는 통신병으로 비밀훈련을 받고 암호취급 부서에 배치된 후 해군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용한 성품 때문에 이 같은 공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뒤늦게 인정을 받아 2014년 5월 6.25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 받았다.

▲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출처=두산

인화·공평 중시

고인은 인화를 강조했다. 그는 "인화로 뭉쳐 개개인의 능력을 집약할 때 자기실현의 발판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 나온다”면서 인화란 공평이 전제되어야 하고 공평이란 획일적 대우가 아닌 능력과 업적에 따라 신상필벌이 행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사원이 일생을 걸어도 후회 없는 직장이 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고인은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라고 항상 강조했다.

글로벌 두산 기틀 닦다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실시하기도 했다.

앞서 동양맥주에 재직중이던 1964년에는 당시 국내 기업에서는 생소하던 조사과라는 참모 조직을 신설해 회사 전반에 걸친 전략 수립, 예산 편성, 조사 업무 등을 수행하며 현대적 경영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두산그룹 출신 한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부단한 혁신을 시도했다.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의 혁신이 대표적이다.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이어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이 같은 선제적인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 1996년 두산그룹 새CI 선포식에서 깃발을 흔드는 박용곤 명예회장. 출처=두산

박 명예회장의 사회생활

고인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1960년 4월로 두산그룹이 아닌 한국산업은행에 공채 6기로 입행했다.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라고 강조한 선친 박두병 초대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3년 동안 은행 생활을 한 고인은 1963년 4월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이후 선진적인 경영을 잇따라 도입하며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고 한양식품,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룹회장을 맡은 이후 1985년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 두산기술원, 두산렌탈, 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잇따라 설립했다. 1974년에는 합동통신(연합뉴스 전신) 사장에 취임해 세계적인 통신사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국제상업회의소 한국위원회 의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영 성과를 인정 받아 1984년 은탑산업훈장, 1987년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23년 간 써내려 간 ‘사부곡(思婦曲)‘ 그리고 겸손함

가정에서의 모습에 대해 유족들은 “아내에 대해 평생 각별한 사랑을 쏟은 남자”로 기억한다. 부인 고(故)이응숙 여사와는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여사는 박 명예회장에게 있어 인생의 ‘동반자’이자 ‘조언자’였다. 하지만, 이 여사는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박 명예회장은 암 투병 중이던 부인의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간병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일찍 떠나 보낸 아내를 한결 같이 그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23년 간의 ‘사부곡(思婦曲)’을 써내려 왔다.

어려서부터 선친에게서 “늘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박 명예회장은 “내가 먼저 양보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또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품고 살았다. 고인은 ‘수분가화(守分家和)’를 가훈으로 삼았고, 형제와 자녀들에게 수분가화라는 붓글씨가 적힌 액자를 선물하면서 분수에 맞는 삶을 강조하기도 했다.

수분가화는 ‘자신의 분수를 지켜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면 ‘능력 범위 안에서 행동하라’는 뜻이며 ‘조금씩 양보하고 참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