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에서, 경찰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휘황찬란한 로비와 높은 월세를 자랑하는 맨해튼의 한 아파트로 들어선다. 그리고 전날 파티를 했음직한 난장판을 보고는 ‘무슨 대학생이 나보다 더 거창하게 파티를 하네’라고 탄식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주인공의 동료는 ‘보나마나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Trust Fund Baby)겠지’라고 대꾸했다.

물가 비싼 맨해튼에서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고급 레스토랑과 술집에서 파티를 즐기는 20대들을 보면서 가끔 했던 생각이기 때문에 실소를 터뜨렸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는 한마디로 부모를 잘 만난 덕에 돈 걱정 없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젊은이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한국에서도 성인이 평생 벌어도 모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금액의 주식을 3살짜리 아이가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됐던 것과 유사하게,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서 미워하는 대상으로 종종 묘사되곤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딸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인 이방카 트럼프가 지난 2003년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본 리치>(Born Rich) 속 재벌이나, 유명 연예인의 자녀들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다.

부유한 집안의 부모들은 자신에게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자식들의 미래에 지장이 없도록 아이들이 어릴 때 트러스트 펀드를 만들어놓는다. 종종 부유한 조부모가 손자들을 위해 만들어놓는 경우도 있다.

트러스트 펀드에 맡겨놓은 돈은 투자나 저축을 통해서 매달 미성년자인 자녀와 손자에게 용돈처럼 지급이 된다. 물론 이 돈은 웬만한 직장인의 한 달 월급보다 많거나 아예 직장인들의 연봉에 육박하기도 한다.

10대 고등학생들이 비싼 명품을 척척 사들이고 흥청망청 파티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 등이 나왔던 미국 드라마 <가십걸> 속 인물들은 대부분 이런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들이다.

18세가 되기 전까지 트러스트 펀드에 들어있는 돈은 후견인이나 관리인이 맡아서 관리하며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만 받게 된다.

그러나 18세나 혹은 21세가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들이 직접 트러스트 펀드를 맡아서 어떻게 투자나 운용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

트러스트 펀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10대나 20대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는 주로 이들을 가리키는 호칭이 된 것은, 돈을 관리할 줄은 모르고 쓸 줄만 아는 갓 성인이 된 이들이, 돈이 마냥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흥청망청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종종 18세가 되어 물려받은 돈을 30세가 되기도 전에 모두 날려버리는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들도 있는데, 이 때문에 요즘은 전체 금액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지 않고 평생 연금처럼 일정 금액만 받도록 하는 라이프타임 트러스트 펀드가 권유되곤 한다.

트러스트 펀드가 반드시 미성년자 자녀에게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원하면 자선단체나 자신이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매달 일정 금액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부자가 아닌 일반 중산층 가정에서도 목돈이 있거나 주식 혹은 부동산 등의 자산이 있으면 이를 트러스트 펀드로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러스트 펀드라는 단어 자체가 20대의 무책임하고 일하기 싫어하고 돈만 흥청망청 쓰는 ‘베이비’들로 연결되는 것은, 전체 미국인 가운데 트러스트 펀드를 통해서 부를 상속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채 2%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후에 자녀에게 상속해줄 재산도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갓 18세가 된 자녀에게 수백만달러의 거금을 척척 안겨주는 트러스트 펀드 부모들이 마냥 좋게 보이지만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