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연인 사이에도, 사제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그리고 직장에서도 말이다. 흔하게 쓰는 이해한다는 말이 위험하다고 본다. 그 이해한다는 제스처 때문에 온갖 갈등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연인(남녀) 사이에도 늘 말한다. “이해해.” 그런데 그 이해의 폭이 진짜 그 사람의 기분이나 상황까지 모두 알고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어떻게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이해(理解)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언제 우리가 서로가 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해’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식에게 “결혼해서 자식 낳아보면 내 심정을 알 거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서 어렸을 적에 필자가 들었던 생각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결혼도 하고 부모도 되어야 하는 건가”였다.

물론 지금은 결혼해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그 당시에 부모님이 필자에게 그런 식으로 왜 이야기를 했는지 말이다. 그런데 여전히 부모님의 마음은 모른다. 아직은 필자의 아이가 없기 때문이다.

위 두 관계는 특별한 이해관계(利害)가 없다. 사회 경제적 운명 공동체인 것은 맞지만, 함께 각자의 일을 하면서 연인 사이의 애정관계에 이상이 없을 정도면 충분하다. 쉽게 말해 두 사람만 좋으면 그만이다.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연인보다는 더욱 가까운 사회 및 경제적으로 공인받은 공동체이지만, 각자의 역할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 부모는 자식의 독립 시기를 고려해 그 전까지 부양의 책임을 지고 있다. 그 과정 속에 관심과 간섭 사이를 넘나들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지 이해(利害)타산을 따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맞다. 이해는 크게 이해(利害)와 이해(理解)로 나뉜다. 연인 및 가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둘 사이의 우선순위에 있어 암묵적으로 둘은 이해(理解)가 이해(利害)를 앞선다.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이들 모두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는 맞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지속적 성장 지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회사는 다르다. 그들은 철저히 이해(利害)관계로 둘러싸여 있다. 조직의 이익이 성장해야 나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 그들의 이해(利害)에 밝은 이들로 더 많은 고객과 이해(利害)관계를 이해(理解)를 바탕으로 맺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우선순위에서 모두가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 원칙이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각자의 주장만 하면서 ‘나만 맞다’ 혹은 ‘내가 맞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이해(利害)가 이해(理解)를 앞선다. 아니, 각자가 추구하는 이해의 색과 모양, 방향 등이 다르기 때문에 늘 충돌한다. 팀 또는 조직에서 의사결정을 위한 어떤 논의를 전개할 때도, 늘 조직이 가장 우선시 하는 대상과 방향이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니 각자의 이해(利害)만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조직을 위해 개인들이 각자의 목적 및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KPI를 세운다. 그런데 모든 개인이 각자의 KPI를 달성했는데, 조직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자,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간단하다. 회사가 맺어야 할 관계 속 고객, 그들과 소통해야 할 직원, 그 직원을 지원해야 할 또 다른 지원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해(利害)관계로서 바라봤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해(理解)를 바탕으로 한 관점으로 봤다면, 그런 식의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마케팅 비용을 100억을 넘게 썼는데, 그 사업이 실패한 것을 해당 마케팅 제안을 했던 직원을 포함, 그들 모두에게 책임을 돌리는 CEO를 뜻하는 것이다. 돈은 돈대로 쓰고 그에 따른 적정한 수입을 얻지 못한 것이 어떻게 그렇게 정리되는 것인가 말이다.

만약 그들 모두가 한 방향으로 특정 부류의 고객을 위해 일하고, 이를 위해 누가 누구를 지원한다는 것이 고객을 위한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요소들이 모두 일방향으로 고객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면 이해관계의 충돌은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하면서 조직이 만든 시스템과 관계없이 옆은 보지 않고, 내가 하는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해해’라고 한다. 아니다. ‘이해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회사에 들어갈 때부터 그리고 일을 하면서 모든 것이 대부분 이해(利害)관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사가 아무리 자신들의 이익을 중시하는 집단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사람이 만들고 함께 꾸려가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의 이해(理解)는 있어야 한다. 그 바탕 위해 그들이 목적 및 목표로 한 고객을 위한 가치 제공을 통한 이해(理解)가 이루어지고, 정당한 이익추구 활동이라고 고객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이해가 직원과 회사 사이에도, 회사를 넘어 고객과도 나름의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이해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만약 그동안 일관성, 진정성 있게 고객을 위한 어떤 전략 및 정책을 수행해왔는데,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충분한 인프라도, 시스템도 구비되어 있었고, 어느 정도의 시장 반응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분명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웠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이해한다고 믿었던 고객이 우리 고객이 아니었거나, 목표로 한 고객이 아닌 이들에게 우리를 어필했거나 하는 등의 오류 말이다.

또한 내부적으로 그에 대한 충분한 합의 과정, 혹은 논리적 흠결을 최소화하려는 별도의 과정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그런 과정 없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가 말이다. 하나의 제품에 하나의 가치만 있지 않고, 여러 가치를 통해 여러 부류의 고객을 상대하는 시대에, 어떻게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을 이끌어내어 나름의 일관성 있는 이해(理解)관계 성립이 될까 말이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누군가를 이해(理解, Understanding)시켜서 그들과 이해(利害)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나 또는 조직의 지속적인 성장과 뚜렷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 이해관계 속 고객으로 향하는 흐름을 알고, 엉뚱한 길로 새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이 리더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이들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어떤 두 종료의 이해에 의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 그 동료와 어떤 식으로 협력 및 협업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지, 그 너머의 누군가는 또 다른 어떤 이와 이해(理解+利害)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해(利害)관계 위에 이해(理解), 혹은 그 반대일지라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와 논리에 의해 일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추천하는 것은 우리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해(理解)의 폭과 넓이를 수시로 비교하면서 추구하는 이해(利害)가 무엇인지 나누어 이해(理解)가 일치되도록 평소에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노력도 없이 그저 경주마처럼 자신의 일만 하면 주의력 결핍 혹은 대인 민감도 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일은 잘하는데, 함께 하는 일을 잘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말로는 이해한다고 하면서, 정작 하는 행동은 내 멋대로인 이들처럼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 매우 많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 같이 타인을 이해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 진짜 사람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