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전구는 일반 사무실이나 가정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암스테르담의 세계 최대 조명전구회사 로열 필립스 NV(Royal Philips NV)에서 분사한 시그니파이 NV(Signify NV)는 이미 지난 수십 년 동안 토마토, 양상추, 장미 같은 식물을 기르는 온실에 회사 제품을 판매하며 원예 산업에 진출해 왔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작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캐나다, 우루과이, 그리고 미국 일부 주에서 대마 사업이 합법화되면서 시작된 대마 제품 붐으로 이 회사가 생산하는 생장 촉진 전구(Grow Lights) 판매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대마 사업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확산됨에 따라 소비가 급증하자 농부들은 대마를 온실에서 기후 조건을 조절해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재배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시그니파이 NV의 에릭 론돌랏 최고경영자(CEO)는 “대마 재배가 합법화된 곳이면 우리는 어디든 진출할 것”이라며 “대마 생산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론돌랏 CEO가 대마 사업과 시그니파이의 연관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변화의 신호다. 시그니파이는 연 매출액 64억유로(8조2000억원)의 대부분을 사무실 및 가정용 조명 기구나 가로등 같은 일반적 용도의 전구 제품을 판매해 벌어들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약초를 재배하기 위한 특수 조명전구를 판매하는 것은 회사의 홍보 대상도 되지 못했다.

론돌랏 CEO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대마 재배의 합법화가 크게 확산되는 추세라는 것을 회사의 매출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최근 몇 년 동안 빠르게 성장한 대마 산업 덕분에 성장촉진전구(grow lights) 같은 조명 장비의 판매도 크게 늘어났다.   출처= Signify NV

온실 산업 붐, 이제 시작

시그니파이의 비즈니스는 대개 예측이 가능하다. 컨설팅 회사 마켓앤마켓(Markets and Markets)에 따르면 원예용 조명 시장은 대마 사업 합법화가 확산되면서 2023년까지 62억달러(7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캐나다의 글로벌 투자은행 카나코드 제뉴이티(Canaccord Genuity)의 알렉스 브룩스 애널리스트는 “유럽의 온실 산업 붐은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으며, 북미도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말했다.

시그니파이 같은 회사들이 기존 산업 이외에서 매출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음료 대기업들과 담배 대기업들이 참여하며 투자를 늘리고 있는 대마 사업의 붐이 마침내 제조업 공급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신호다. 더욱이 원예용 조명전구를 생산하는 곳은 시그니파이가 유일한 회사가 아니다.

독일의 경쟁사 오스람(Osram Licht AG)도 몇몇 원예용 전구 전문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오스람은 지난해 5월에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스타트업 플루언스(Fluence)를 인수했다. 이 회사도 시그니파이처럼 보다 에너지 효율적인 온실용 LED 전구를 판매한다. 이 회사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알래스카주 주도(州都)인 주노(Juneau)에 있는 ‘파이어위드 팩토리’(Fireweed Factory)라는 곳의 광고가 올려져 있다. 이곳은 연간 약 100만명의 방문객이 드나들며 지역의 관광 수요에 일조하는 곳이다. 오스람은 “대마 같은 약초 식물 재배자들”에게 특수 조명 전구를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분 산업의 성장 전망도 조명 전구 업계로서는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50여 개국이 약용 대마초를 합법화했으며 올해 약 10개국이 추가로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지난해 대마 처방이 합법화된 후 최근 네덜란드로부터 첫 벌크가 들어왔다.

동유럽 기술 투자은행 브라이언 가르니에(Bryan, Garnier & Co.)의 니콜라스 파에스 애널리스트는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경우, 전 세계 대마 합법 시장은 2017년 99억달러(11조원)에서 2027년에는 2320억달러(260조원)의 거대 시장으로 급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조명, 습도, 온도조절장치가 갖춰진 새로운 대마 전용 온실을 갖춘 대마 재배 회사들이 늘어나면서, 이전에 다른 농작물을 재배했던 온실을 개조해 사용하는 회사들보다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그니파이의 론돌랏 CEO는 시그미파이가 토마토, 오이, 튤립, 대마초 등 개별 작물에 적합한 전용 조명 제품을 150종 이상 개발했기 때문에, 경쟁사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각 작물은 생산량을 늘리고, 개화와 뿌리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각기 다른 적합한 빛의 양과 지속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줄기 빛

론돌랏 CEO는 지난 2016년 시그니파이가 상장되기 이전부터 회사를 이끌어 왔다. 회사는 소비자들이 전통적인 조명 기구에서 발광 다이오드(LED)로 전환하면서 아직 매출 증가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브렉시트와 미국의 재고 증가, 무역 관세, 중국의 성장 둔화도 회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원예 사업의 성장은 이 회사에게 한 줄기 빛과 같다.

현재로서 온실 조명 장비나 대마 전용 조명 전구에서 큰 이익이 나지는 않지만, 론돌랏 CEO는 “원예 산업은 이미 상당한 시장 규모인데 앞으로 더욱 흥미롭게 성장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