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모든 존재를 재탄생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 앞에서는 물도 그저 흐르기만 하거나, 한 공간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다.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으며, 각종 상황에 직접 반응하는 인간 같은 존재가 된다.

시인이 모든 존재물을 재탄생시킬 수 있는 이유는 의인화라는 시 창작 방법 덕분이다. 우리는 그동안 ‘시의 의인화 작업’이 상상에 의한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3년인가, 필자가 읽은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 박사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은 시인들이 즐겨 쓰는 ‘자연의 의인화’가 결코 상상만이 아님을 보여줬다.

물에 말을 들려주고 글씨를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물의 입자가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사랑’, ‘감사’라는 글을 보여주거나 들려준 물에서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났고, ‘악마’라는 글을 보여주거나 들려준 물에서는 중앙의 시커먼 부분이 공격하는 듯한 형상을 보였다고 한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때는 정돈되고 깨끗한 결정을 보여주었지만 ‘망할 놈’, ‘바보’, ‘짜증나네, 죽여버릴 거야’ 등과 같이 부정적인 말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폭력을 당하는 듯한 형상을 드러냈다고 한다.

음악에도 반응을 보여 쇼팽의 <빗방울>을 들려주자 정말 빗방울처럼 생긴 결정이 나타났고 <이별의 곡>을 들려주자 결정들이 잘게 쪼개지며 서로가 이별하는 형태를 취했다고 한다.

이러한 실험 결과 저자 에토모 박사는 “물도 의식을 갖고 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적고 있다. 물이 이처럼 감성과 의식을 가진 생명체라면 시인의 의인화 태도는 상상을 넘어 과학적 상황으로 해명될 수도 있다.

이즈음 한 가지 생각할 게 있다. 물의 입자가 육각형으로 만들어지도록 하는 좋은 대화는 인간의 항심(恒心)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고 두려움이 가득하면 자연과 좋은 대화가 이뤄지겠는가.

항심은 글자 그대로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이다. 자연을 대하는 데 떳떳한 마음이 있어야, 그것도 잠시 잠깐이 아니라 늘 그러해야, 항심이 이뤄지고 자연과의 즐거운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이문재 시인이 자신의 시 <봄 편지>에서 보여주는 항심(恒心)의 의미는 이렇다. 시인에 따르면 이 항심은 ‘상류에서 하류까지 수평선에서/ 구름 물방울에까지 이르는’ 존재다. 즉, 위·아래든 양옆이나 앞·뒤 어디든 공간 이동을 하며 자연과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음의 날개가 항심인 것이다.

시인은 이를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물, 그 물의 흐름에 올라탄 꽃잎을 관찰해서 찾아낸다. 기온이나 바람, 물 흐름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평균치와 시인의 마음을 접목해 얻어낸 결과다.

그럼에도 시인은 정작 자신의 항심 보기에는 실패한다. 왜일까. 항심은 어느 날 갑자기 보여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항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자신의 마음을 갈고닦아야 한다.

물론 항심 없이도 자연과의 좋은 대화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순간이다. 언제나 늘 변치 않는 상황이어야 자연과의 좋은 대화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이 기운이 자신의 몸이나 기업에 접목될 수 있다.

자신의 몸에 이 기운이 접목되면 건강이 담보되고, 기업에 접목되면 환경 친화라는 이 시대 기업의 덕목으로 연결된다. 어찌 이를 외면하겠는가.
황인원 시인·문학경영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