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먼의 아버지는 러시아 이민자였고, 그는 길먼이 10살이 되었을 때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혼자서 3명의 아들을 힘겹게 키워야 했다. 길먼은 모범생이었고, UCLA 의대를 졸업하고 하버드와 콜롬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977년, 그는 미시간 대학에서 신경학 분야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앤아버(미시간 대학이 위치한 도시)로 갔다.

길먼은 그의 큰아들인 제프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다. 제프는 어린 시절부터 정신 질환을 앓았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집을 나갔는데, 결국 1983년에 캠퍼스와 가까운 호텔에서 약을 먹고 자살했다.

길먼의 인생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고, 결국 가정생활은 파탄이 났고 길먼은 부인과 이혼했다. 길먼은 둘째 아들인 토드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는데, 토드 역시 그의 형처럼 게이였기 때문이었다. 길먼은 이러한 가정적인 고통을 잊으려는 듯 일주일에 7일을 연구실에 출근하며 의학 연구에 몰입했다. 그는 여러 연구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9권의 책을 직접 쓰거나 편집하면서 명성을 날렸는데, 특히 알츠하이머와 치료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됐다.

2002년 어느 날, 길먼은 거슨 리만 그룹(GLG, Gerson Lehman Group)이라는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회사는 특정한 산업의 전문가와 투자자를 연결해주는 일을 했다. GLG는 길먼에게 GLG의 전문가 네트워크에 조인해서 한 시간에 1000달러를 받을 수 있는 컨설턴트가 되기를 권유했다. 길먼은 동의했다.

<미국 의학 협회 저널>은 2005년에 미국 의사의 10%가 월가에 자문을 해주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 수치는 1996년 대비 75배 증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헬스케어 산업이 월가의 주요 관심 분야로 급부상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었지만, 또한 공정 공시 규정(Regulation Fair Disclosure)의 제정으로 인한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Regulation FD의 제정으로 상장기업이 미공개 중요 정보를 애널리스트들에게 선별적으로 미리 제공하는 것이 금지됐고, 따라서 헤지펀드의 애널리스트들은 회사의 IR팀으로부터 직접 회사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길먼은 전문가와 산업계의 연결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GLG에 보낸 이메일에서 투자자들과의 소통이 자신의 연구에 신선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했다. 길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GLG를 통해 헬스케어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진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길먼의 대학 연봉은 32만달러였다. 그는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GLG를 통한 미팅은 나름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30분 컨설팅에 1000달러를 받았는데, 이 금액은 기업 변호사들이 받는 돈의 2배 수준이었다. 직접 대면 미팅을 하는 경우에는 2000달러를 받았다. 길먼은 컨설팅을 시작하면서 1년에 수십만달러를 더 벌기 시작했다.

2006년 여름, 길먼은 매튜 마토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SAC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고 있고, 헬스케어 주식에 관심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들은 알츠하이머의 치료법에 대해 이야기했고, 특히 ‘바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토마는 바피가 성공한다면 엘란과 와이어스는 엄청난 대박을 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바피의 전망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바피를 통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그는 바피의 임상시험 진행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치료약에 대한 그의 집착은 탐욕과 결탁되면서 그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었다.

매튜 마토마는 1974년에 미시간에서 출생했지만 플로리다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1960년대에 인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마토마의 아버지 바비는 19세에 미국으로 건너왔고 호워드 대학을 졸업했다. 마토마가 태어날 때 어머니는 미시간 의과대학의 레지던트였다. 바비는 미시간에 있는 포드자동차에서 엔지니어로 직업을 얻었지만 플로리다로 이사를 갔다.

바비는 마토마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컸고, 아들에게 성공해야 한다는 상당한 압박을 가했다. 그는 마토마가 하버드에 진학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했다. 마토마는 순종적이었고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지만 하버드에 입학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마토마는 듀크 대학에 진학했고 아버지는 분노했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마토마의 18번째 생일날에 ‘아버지의 꿈을 깨트린 아들(Son Who Shattered His Father’s Dream)’이라고 쓴 명판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토마는 듀크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국립보건연구소에서 1년간 일을 한 후 저명한 학술지에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논문을 공저자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를 받았다.

마토마는 스탠퍼드를 졸업한 후 보스톤에서 시리오스 캐피탈 매니지먼트라는 작은 헤지펀드에서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스티브 코언이 운영하는 헤지펀드인 SAC가 접근해 왔다. SAC의 인사 담당자는 마토마가 바이오테크 분야에서 아주 기대가 찬 펀드매니저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바이오테크 산업은 붐이 일고 있었고, 많은 회사들이 신약 개발을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SAC는 마토마에게 입사를 제안했다.

마토마는 망설였다. 헤지펀드 업계의 경력이 아직 짧기는 했지만 SAC에서 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SAC는 매우 공격적인 헤지펀드였다. 그가 SAC의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는 조용하고 점잖은 타입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SAC가 가진 강력한 매력은 돈이었다. SAC의 펀드매니저는 큰 돈을 운용하고 있으며, 만약 돈을 벌어들인다면 아주 빠르게 부자가 될 수 있었다.

SAC의 제안에 마토마는 구미가 당겼다. SAC는 마토마에게 4억달러를 맡기고 벌어들이는 돈의 17% 이상을 성과급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추가로 연말 기준으로 15%의 수익률을 기록하면 추가로 1000만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SAC는 그에게 기본 급여로 20만달러를 지급하고, 이적 보너스로 200만달러를 주었다.

마토마는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 간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는 유럽 주식시장이 열리는 새벽 4시부터 일을 시작했고, 미국 주식시장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아내를 도와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리서치 보고서들을 읽었다.

SAC는 마토마를 비롯해서 펀드매니저들에게 막강한 정보를 지원하고 있었다. SAC는 내부에 강력한 리서치 팀을 구축해서 지원했고, 이에 더해 외부의 독립적인 애널리스트, 그리고 다양한 투자 자문 회사들까지 고용하고 있었다. 또한 SAC는 GLG와 계약을 맺고 있었고, 그들은 마토마가 수천 명의 전문가들과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토마는 SAC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바피에 투자하고 있는 엘란과 와이어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006년 8월 30일, 그는 바피의 임상시험에 관여된 22명의 의사 명단을 GLG에 보냈는데,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해 상충을 이유로 접촉을 거부했다. 임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실험의 진행 내용에 대해 외부에 말해서는 안 된다는 비밀 약정에 서명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GLG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알츠하이머 연구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 신경학 분야의 권위자인 미시간 대학의 길먼이었다. 물론, 그는 오직 공개가 가능한 정보에 대해서만 공유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시작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악마는 결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