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정통 액션이 아닌 코믹물은 성에 차지가 않았다. 개연성 없어 보이는 전개가 못마땅했다. 그러다 대학생 때에 주성치라는 배우가 등장했다. 그런데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에 황당했다. 강렬하고 비장한 액션물의 감동을 갈구하는 마음에 주성치의 실없어 보이는 장면들은 비정상이었다. 그 뒤로도 주성치 영화는 극장에 걸렸지만 극장에서 돈 주면서 보기엔 아까웠다. 그 뒤로 소림축구, 쿵푸허슬 같이 주연뿐만 아니라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맡은 영화들이 계속 나왔다. 우습고 황당무계하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뭔가가 있었다. 곱씹어 볼수록 정통 액션에서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동이 전해졌다. 그러다보니 어느 틈엔가 못보고 지나간 그의 걸작 서유기 선리기연, 월광보합 같은 작품들도 다시 찾아 보게 됐다.

그땐 액션 아니면 멜로였다. 액션은 청소년 관람가 멜로는 관람불가, 그 속에서 주성치식 영화는 없었다. 액션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가볍고, 르와르라 불리기엔 해퍼보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코믹과 액션 르와르가 결합된 짬뽕 장르가 생겼는데, 새롭게 포지셔닝된 우습고도 감동적인 액션 활극은 아직도 쌩쌩하다.

 

Good News 보다 훨씬 긴 생명력을 지닌 Bad News

사람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기억할 때 ‘선’ 아니면 ‘악’의 이분법적 단순한 인식을 가진다. 어릴 적 모든 영화를 액션 아니면 멜로로 구분한 것처럼, 복잡한 내용 속에서 다양한 사안들이 얽혀 있지만 디테일은 날아가 버리고 결국 Good 아니면 Bad로 기억된다. 뉴스를 대할 때도 기업이 봉사를 펼치고 수주에 성공했거나 수출이 늘어나고 매출이나 실적이 호전되면 Good 이미지가 남지만, 오너리스크를 비롯하여 사건 사고가 있거나 매출이나 실적이 줄어들고 주가가 하락하게 되면 이유가 어찌됐건 Bad 이미지만 남는다. 그런데 Good은 기억하고자 해도 쉽게 지워지지만, Bad는 그 힘이 강해서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는다. 또 잊혀진 듯 하다가도 되살아난다. 

예전 직장은 Good Company의 대명사였다. 막강한 자금력으로 소리소문 없이 재계의 강자로 부상했고, 1990년대부터 수출로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국내 전선업에서는 확실한 선두를 계속 유지했다. 2대 회장이 2004년 3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상속세 1,355억원을 자진 납세를 했는데, 재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범이었다. 

그랬던 것이 국내 대기업들 중에서도 가장 짧은 시간에 완전 드라마틱한 풍파를 겪게 된다. 그리하여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Good Company의 꼬리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Bad Company’의 낙인이 찍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재계의 돈주머니’가 빚더미에 올라앉기까지

당시 보유자금이 많아서 ‘재계의 돈주머니’로 불렸다. 2005년 초 소주로 유명한 진로의 인수전이 있었다. 큰 기업들만 참여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놀란 것은 우리 회사의 단독입찰이었다. 더 큰 회사도 산업은행을 비롯한 대형 은행이나 군인공제회 또는 교원공제회 같이 대규모 자금을 굴리는 기관들과 손을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가진 돈이 얼마나 많았으면, 혼자서도 진로 정도는 인수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줬다. 그런 자금력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또 부러워했다. 흉내 낼 수 없는 자금력, 탄탄한 주력사업, 모범적인 납세기업 그러고도 그런 걸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진로 인수전은 무위에 그쳤지만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선업종에서만은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불태웠다.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글로벌 1위를 꿈꿀 수 있는 국내 기업은 거의 없었다. 2007년 11월 글로벌 1위의 야망에 발동을 걸었다. 대상은 세계 2위의 이탈리아 전선회사 프리즈미안이었다. 인수하면 8위였던 당시 회사와 합쳐 단박에 1등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글로벌시장에서 프랑스 넥상스가 1등 이었고, 2등은 프리즈미안이었다. 지금은 LS가 3등이지만 당시엔 3등부터는 독일과 일본 기업들이 있었다. 유럽의 선진 전선 시장은 넥상스와 프리즈미안 같은 선두권 유럽 회사들이 독식하고 있어서, 늘 동남아나 중동권의 험지에서 피 튀기는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프리즈미안을 인수하면 선진 시장을 무대로 삼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런데 하늘이 반대를 했는지, 불운하게도 시간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2008년 가을 갑자기 금융위기가 닥쳤다. 리만브라더스라는 어마 무시한 회사가 파산했는데 이를 신호탄으로 세계 곳곳에서 곡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전까지 프리즈미안 외에도 국내 여러 건의 인수 합병과 투자를 진행했는데 금융위기라는 태풍이 몰려오자 한 방에 녹다운 되고 말았다.

국내외 여기저기에 인수하거나 투자한 돈은 자고 나면 손실이 늘거나 가치가 증발하는데, 줘야 될 돈은 쌓여만 갔다. 2009년 초가 되자 프리즈미안의 주식이 처음에 매입했던 가격의 3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떨어진 주가야 회복할 테지만 채권단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인수한 여러 기업들도 풍전등화였다. 빌려주거나 투자했던 돈은 만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Good Company와 Bad Company 사이엔 GCBIM

급한 대로 사옥부터 처분하고 땅, 계열사, 보유 지분 같이 돈 되는 것들은 다 팔았다. 세계 1등의 꿈은 날아가고 프리즈미안 투자금의 절반만을 겨우 건졌다. 갈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빚을 갚을수록 부채비율이 더 높아졌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산을 팔아서 빚을 갚으면 부채가 줄기는 하지만 자본금도 깎아 먹기에 분모가 줄어든 만큼 부채비율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었다. 팔 수 있는 건 줄어드는데 정작 빚은 생각보다 줄지 않았다.

1955년 창립이래 단 한번도 적자 없이 운영되던 기업이었다. 첫 적자를 엄청난 규모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재무제표의 숫자로 기업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금융쪽 기자들 시각이 특히 무서웠다. 오죽했으면 이미 십 수년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해 왔으면서도 6개월간 불면증에 시달렸을까? 그때는 아침이 두려웠다.

어떻게 해도 Good Company로는 포장이 불가능했다. 그때 주목한 것이 ‘GCBIM (Good Company but in Misfortune)’이었다. 한마디로 ‘아까운 기업’이다. Good Company라 할 수 없는데도 Good Company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정 반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스스로 Bad Company로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토리를 만들어 공감을 사는 전략으로 나갔다. 그 스토리의 힘이 Bad Company라는 절벽의 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주었다. 누구나 인정하던 Good Company였지만 한 순간 Bad Company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 했는데,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아까운 기업’으로 인식되며 심각한 이미지 훼손은 피했다. 그 옛날 액션과 멜로 밖에 없던 인식 상황에서 코믹 액션이 파고들기까지는 이해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GCBIM 기업의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실적 발표를 수개월을 앞둔 시점부터 거의 모든 기자들을 만났다.

적극적인 GCBIM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로 성공한 대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후로도 계속된 자구책의 충실한 이행으로 회사는 다시 살아났다. 여론에서 십자포화를 맞아 Bad Company의 굴레를 뒤집어 쓴 기업들 중에는 실상 어쩔 수 없었던 아까운 기업들이 많다. 그런 기업들은 실질에 의해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이미지에 의해 펀치를 맞고 나가떨어진다. 

2016년 4월 한화 대 기아전의 프로야구 중계방송에서 허구연 해설위원이 ‘9-10위팀 경기인데, 방송사의 중계 1순위다. 예전엔 있을 수 없는 일' 이라며 한화를 화제에 올렸다.  2009년 8위에 이어 2016년까지 순위에 있어서는 거의 매년 거의 바닥을 기었는데 반해, 방송사 중계순위뿐만 아니라 한국프로스포츠협회가 발표한 2015년 프로구단 성과 평가에서도 한화는 최고 등급을 받았다. 그건 구단의 마케팅전략도 전략이지만 두터운 팬층 때문이라 생각된다. 2013년 5월 19일자 경기에서는 일반 여성이 시구자로 나서서 화제를 모았다. 그 해 한화가 첫 승을 올린 것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결과였다.

팬들의 가슴 속에 한화는 잘 하는 팀은 아니지만 애정 가는 아까운 팀이 아니었을까? 프로스포츠라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패배가 반복되면 팬들은 떠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반대로 꼴찌 팀의 경기를 보기 위해 만원관중을 기록하는 흔치 않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는데 전략적 포지셔닝의 효과다.

투자한 주식이 떨어질 때면 쉽사리 처분할 수 없는 것이 본전 생각이고 다시금 오를 것만 같은 욕심 때문이다. 현명한 투자자는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고, 손실을 보더라도 과감한 손절매로 더 큰 손실을 줄인다.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여서 Bad 인식을 거짓으로 포장하다가는 오히려 더 큰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 GCBIM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