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설날 아침에 차례를 추도 예배 형식으로 짧게 지냈습니다.
식구래야 ‘아’자 돌림인 아버지, 아내, 아들과 나까지 네 명였습니다.
새해에는 조바심과 근심을 많이 하는 걱정 릴레이를 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원래의 성품인 밝고, 건강한 한해를 만들자고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아침의 그런 자리마저도 핸드폰을 들고 있는 아들에게 눈치를 주었습니다.
설날 하루 정도는 핸드폰에서 해방되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말이죠.
그 순간 각자의 핸드폰 위치를 슬쩍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아들은 손에 들려있고, 아내는 눈에 보이는 위치에 전화를 놓았더군요.
내 것은 충전기가 있는 안방 탁자에 고정되어 있고,
아버지는 들고 오신 가방 속에 고이 모셔두었더군요.
나이 차였을까요? 아님 습관일까요? 그 위치들이 재미있게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식구는 단촐했지만, 설날 하루 동안 집안일 돕고, 오고 가는 분들 맞고, 보내드리고,
인사할 데 전화 드리고, 그러다보니 져녁이 되어서야 차분히 핸드폰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도 하루중 시간을 정해 두, 세 차례만 전화를 보는 스타일인데, 그날은 더 뜸했지요.
단체 톡방은 말할 것도 없고, 소규모 친구들 그룹이나
친지와 가족들의 개인 인사가 꽤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진즉부터 핸드폰 같은 온라인 상의 인사나 접촉은 최소로 하자는 주의였습니다.
아직도 책 사러 서점 가거나 전화 드리고 찾아뵙는 것 같은 오프라인 상의 만남을
월등히 선호해서 구석기 사람이라는 비난을 적잖이 들어 왔는데, 이날은 아차 싶었습니다.
그룹 단톡방에 남긴 형식적인 인사야 무시할 수 있다손 쳐도,
친구 몇 명이서 이름을 거명하며 안부 남긴 것에 십여시간이 지나서
회신을 한다는 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거기에는 ‘올해는 충청도 스타일에서 벗어나 좀 날랜 친구로 변신을 기대한다’라는
덕담 아닌 덕담이 들어 있기도 했습니다.
더 난감했던 것은 전화로 직접 인사를 드렸기에 기대를 안했던 친지 어른이나 선배 분들이
남긴 안부 인사를 십여 시간 회신을 못해 결과적으로 결례를 범하게 된 점이었습니다.
함께 한 가족들은 이런 나를 보고, 내 철학(?)을 지지해주기보다,
구속되기 싫은 것만 생각한 자세가 드러난 거라고 눈치를 주는 듯 했습니다.
성장을 멈춘 어른으로서 어딘가로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어른이라 생각했을까요?
극성(極盛)의 핸드폰 문화가 한 테이블에는 앉아 있지만, 서로들 각자의 핸드폰에 빠져
한 자리 모임을 공허하고, 겉돌게 하며 서로를 분리한 듯한 그 점을 우려해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십여년 전 아이들이 사춘기 통과할 때 자기 방에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던 비정상적 질풍노도의 시기가 연상되기도 했었거든요.
핸드폰에서 하루도 해방되지 못한 내 스스로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번 한 번의 아차 실례 차원이 아니라
내 생각을 바꾸어 대세에 맞게 살라고 하는 듯 했습니다.
요즘 미세 먼지 경보, 건조 주의보, 한파 경보 등을 자주 들은 탓 였을까요?
‘핸드폰 상전 시대가 도래했습니다’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