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서 성폭행’ 혐의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지난 1일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1심과 달리 안 전 지사가 수행비서 김지은씨를 상대로 저지른 10차례의 범행 중 9차례의 범행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 까닭이다. 이에 피고인 신분의 안 전 지사는 피해자가 피해를 당한 다음날 아침 안 전 지사를 위해 순두부 식당을 알아본 것, 안 전 지사가 이용하던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한 것, 피해를 당한 직후 동료들에게 장난을 치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안 전 지사에게도 이모티콘을 보내 친근감을 표시한 것 등이 도저히 피해자라고는 볼 수 없는 행동이라는 점을 들어 두 사람 사이의 성관계는 안 전 지사의 위력에 의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 합의에 의한 것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러한 피해자의 행동은 피해자가 수행비서로서의 업무를 성실한 수행한 것일 뿐, 실제 간음 당한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피해자 진술이 주요 부분에 있어 일관되고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지 않는다면, 사소한 부분에서 일관성이 없거나 최초 진술이 다소 불명확하더라도 진정성을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범죄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다. 특히 성인 남녀 간의 성관계는 그것이 합의에 의한 것으로서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성매매처벌법)’이 금지한 금전, 재산상의 이익을 매개하지 않는 이상 처벌 대상조차 되지 않기에 그것이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는지, 아니면 항거 불능한 폭행과 협박,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이었는지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해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피해자의 일관된 ‘피해자다움’은 성범죄 재판에 있어 거의 매번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만약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가 사건 발생 직후 가해자와 사건 발생 이전과 다름없는 정상적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적어도 두 사람의 성관계는 합의에 의한 것으로 추단해 볼 수 있다는 것이 가해자 측 변호인의 주된 변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미투(Me too) 운동’이 사회적 이슈로 자리매김하면서 법원의 판단기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의 도입으로 그것이 성범죄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가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 등을 고려해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눈높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안 전 지사의 사건에서도 법원은 피해자가 사건 직후에도 안 전 지사에 친근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사람’의 기준에서는 다소 일관성 없는 태도로 보일 수 있으나, ‘수행비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죄판단의 기준으로 삼은바 있다.

‘성인지 감수성’개념이 우리 대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과 여학생들에게 공공연히 성적인 발언을 하고 수업시간에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한 교수가 해임처분을 당하고 소송을 낸 뒤 1, 2심 법원을 거쳐 지난해 4월 받은 대법원 최종 판단에서였다. 교수에 대한 해임은 정당하다고 판단한 1심 법원과 달리 항소심 법원은 피해자인 학생들 중 한 명이 교수에 대한 강의평가를 긍정적으로 하였다는 점, 또 다른 피해자 역시 친구의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증인으로 나서는 등 자발성을 보이면서 정작 자신이 교수로 입은 피해 사실에 대해서는 신고하는 것조차 주저하는 것은 피해자로서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교수에 대한 해임처분은 부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의 관점에서 이를 달리 보았다. 우리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에서의 성범죄 피해자, 특히 사제지간이라는 특수성에 비추어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한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피해사실을 신고한 후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러한 점들만 가지고 피해사실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개념을 고려한 피해자 중심의 성범죄 판결을 하였으며, 이번 안 전 지사 사건은 항소심 단계에서부터 전향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어서 ‘성인지 감수성’개념은 향후 다른 성범죄 사건을 심리함에 있어서 하나의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일각에서는 지금도 성범죄 사건의 경우 뚜렷한 증거가 없어도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면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그 판단기준에 있어 ‘성인지 감수성’까지 고려하게 되면 자칫 성범죄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진다는 비판도 있으나,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이 같은 추세는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