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째 배우의 꿈을 놓지 못하는 남성 환자의 돌출입 수술이 있는 날이다. 역시 돌출입이 심한 편인 어머니는 묵묵히 아들의 꿈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평생 시장 한 켠 수선집에서 바느질을 해왔다고 한다.

수술 잘 해야지 하는 사명감을 느끼며 수술복으로 갈아입는데, 미국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은행원이었던 친구는 갑자기 자신이 재미 한인 방송 홈쇼핑에 쇼호스트로 나온 장면을 보내주더니, 엑스트라 배우 오디션에도 합격을 해서 곧 드라마에도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쇼호스트이자 엑스트라 배우로 변신한 그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 <동아전과> 표지모델 출신이다.

사실, 필자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 세대가 소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세대차를 피부로 느꼈듯이, 젊은 세대에게 국민학교란 말은 실감이 안 날 것이다. 그때도 교과서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학습지가 있었는데, <표준전과>와 <동아전과>가 양대산맥이었다. 여기서 전과(全科)란 초등학교의 전 과목에 걸친 학습 참고서다.

어느 날 필자의 국민학교에서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선생님들이 전교생 180명을 자연학습실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는 한 줄로 줄지어 천천히 자연학습실을 걸어 나가게 했다. 걸어 나가는 장면을 낯선 사람들이 찬찬히 살펴보더니 몇 명을 콕 집어 따로 불러세웠다.

‘지금 이건 무엇인가요? 선생님?’ 어떻게든, 뭐든 잘하고 싶었던 호기심 많은 필자는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선생님은 씨익 웃으며, ‘그냥 별 것 아냐’ 라고 대답했다.

몇 달 뒤 친구들 사이에 와아~ 하는 소란이 있어서 가보니 새 학기에 새로 나온 <동아전과>였다. 그때 콕 집은 친구들이 표지모델로 나와 있었다.

복기해보면, 자연학습실을 걸어 나온 건 미모 테스트였고, 낯선 아저씨들은 아마 그 출판사 임직원이었을 것이며, 길거리 캐스팅이 아닌 초등학교 방문 캐스팅을 한 것이었다.

요즘 같이 자기 의지로 자원해서 미모와 아름다운 체형을 심사받아 미의 여왕이 되겠다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도 여성의 상품화라는 패러다임에 준해 공중파 방송을 하지 않는 판국에, 미모로 승부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거나 원치 않는 초등학생을 일렬로 줄 세워서 누가 더 잘생기고 예쁜가를 임의로 평가한 것은 대단한 인권침해임이 틀림없다. 특히 만약 요즘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누가 누구 마음대로 우리 아이를 줄 세워서 너는 예쁘게 생겼으니 이리 오고, 너는 평범하거나 못났으니 그냥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했는가에 대해서, 아마 거센 항의를 넘어 소송을 제기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름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필자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학습실에서 필자가 지금 뭘 잘해야 하는지 즉, 필자에게 요구되는 미션이 무엇인지를 몰라 당황했던 기억, 낯선 사람들이 뭔가를 유심히 살피고 어떤 친구들을 골라내는데 그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 의아해 했던 수수께끼 같은 기억, 선택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느꼈던 의문의 좌절감, 그땐 몰랐지만 좀 독하게 말하자면 어린 인권을 유린당했기에 느꼈던 모멸감. 그리고 선택받은 몇 명이 <동아전과> 표지 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목도한 농밀한 기억.

후일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더니, <동아전과> 표지모델을 했던 당사자 친구 중 몇은 묘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고, 어떤 친구들은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기억을 해냈으며, 또 어떤 친구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몇몇은 전과라는 게 있었는지도 몰랐다.

동창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필자가 한 말은 ‘그때 내가 외모로 선택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난 공부를 해야 되는구나 생각했어. 하하, 일종의 복수심이랄까?’였는데, 정말 그런 효과가 있었다면 감사할 일이다.

사실 어린 필자는 반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키가 작았고, 뼈밖에 없다고 할 만큼 비쩍 말라서 옷태도 나지 않았던 데다가, 굵은 모래밭 운동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수시로 넘어져 무릎과 손바닥이 피딱지 투성이인 장난꾸러기였다. 다행히 국민학교도 겨우 우등졸업을 하고, 중고등학교 때는 키도 성적도 쑥쑥 올라,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워너비인 S대 의대생이 되었다. 바로 그 문제의 자연학습실에서 모인 첫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각자 자기 소개를 할 때 필자가 S대 의대 2학년이라고 하자 친구들 중 반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 50세가 넘은 국민학교 동창들을 일렬로 세우고, 명품잡지의 인물소개 세션에 모델 캐스팅을 한다면 슬쩍 줄 서봄직하다. <동아전과> 표지모델 출신의 친구들도 세월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들 중 몇은 배가 나오거나, 머리숱이 휑해지거나, 주름살이 깊어졌고, 누군가는 연락도 되지 않는다.

외모에 의한 선택은 사실 현재에도 암암리에 ‘자행’되고 있다. 채용 면접을 볼 때, 맞선이나 소개팅을 할 때, SNS에서 친구신청을 하거나 받을 때, 판검사와 방청객이 증인의 증언을 들을 때, 보험판매사의 설명을 들을 때,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넘어갈 때, 정치인들의 선거유세를 들을 때, 홈쇼핑 쇼호스트의 설명을 들으며 구매를 결정할 때, 그리고 환자가 필자에게 돌출입 수술을 문의하며 진료를 받는 그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서로의 외모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압도당하거나 최소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

필자가 돌출입 환자들의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에 잘 공감하는 배경에는, 필자의 어린 시절 외모로 선택받지 못한 좌절감을 맛본 경험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12살 꼬마의 원치 않았던 강제 외모테스트는 이제 여유있게 웃을만한 추억거리다. 그러나 특히 돌출입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웃어넘길 수는 없는 듯하다. 오히려 더욱 절실해져서 필자를 찾는 중년을 많이 접한다. 어린 시절, 원숭이, 고릴라, 개구리, 오리, 붕어, 메기 등의 원치 않는 별명으로 놀림받은 상처도 무시 못 할 것이다.

필자가 외모지상주의자라고 할지 몰라, 연암 박지원의 소설 <광문자전> 한 구절을 소개한다. 마흔 살이 된 광문에게 왜 아직 장가를 가지 않느냐고 묻자, 광문은 “무릇 미색을 다 좋아하는데, 비단 남자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여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못생겼기 때문에 어떤 여자의 마음도 끌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조선시대 봉건적인 남성 위주의 가치관으로는 매우 획기적인 남녀평등 사상이다. 요즘은 여성들도 남성의 외모에 대놓고 환호한다. 갑질을 하거나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의 뉴스기사 댓글에는 얼굴 값한다는 외모 비하 댓글이 그득하다. 이것이 좋은 현상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살아있는 한, 아름다움이 더 힘이 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