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라자라트남은 IBM 빌딩 34층에 위치한, 투명한 유리로 벽을 만든 그의 코너방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2009년 갤리언 그룹은 자산 규모 70억달러, 직원들 수는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들을 포함해서 130명에 달했다.

갤리언은 아무 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성공적인 헤지펀드가 돼 있었다. 라자라트남은 즐거움을 만끽할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투자 제국은 미국을 넘어 인도 뭄바이, 그리고 스리랑카까지 넓게 퍼져 있었다.

그가 ‘뜨거운 정보’를 얻으면 그저 유리문을 열고 나가 충성스러운 트레이더들에게 매매를 지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보스가 지시하는 종목들은 언제나 큰돈이 되었다. 그렇게 기업의 내부정보는 라자라트남의 사무실에서 황금으로 바뀌었다. 갤리언 펀드가 위치한 뉴욕 IBM 빌딩 34층은 가히 ‘21세기의 엘도라도’라 할 수 있었다.

지난 여름, 그는 자신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나한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그 여름, SEC, FBI 그리고 뉴욕 남부지검은 라자라트남을 잡기 위해 비지땀을 흘렸다. 그들은 라자라트남과 그 일당이 상상도 못할 도청까지 하며 증거를 모으고 있었다. 뉴욕 남부지검과 FBI는 D-Day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가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0월 15일 아주 이른 새벽 시간, 갤리언 사건을 추적해 온 FBI의 특별 수사관인 B. J. 강은 출입국 관리소 직원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라자라트남이 10월 16일 런던행 비행기를 탄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가 런던에서 스리랑카 주식시장에 투자하기 위한 2억달러 규모의 펀드 출범에 참여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갈 예정이라는 정보였다.

B. J. 강은 이 정보를 상사에게 보고하고 FBI 동료들에게 전화를 하며 잠을 깨웠다. 그들은 새벽에 FBI 사무실로 집결했다. FBI는 급히 이 정보를 뉴욕 남부지검에 알렸고, FBI와 뉴욕 남부지검은 아침에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원래 라자라트남과 그의 정보원들에 대한 체포는 10월 말쯤 예정돼 있었다. 일부 FBI 수사관들에게는 할로윈 데이에 있을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비상 대기 상태였다. FBI는 월요일이나 금요일의 체포는 가급적 피하고 있다. 월요일은 주말 동안 급박하게 상황이 바뀔 수도 있으며, 금요일은 보석 문제가 잘 되지 않으면 혐의자가 주말 동안 감옥에 있게 되는 부담 때문이었다.

뉴욕 남부지검과 FBI는 다음 날인 10월 16일 새벽에 라자라트남과 그의 정보원들을 급습하기로 결정했다. 검찰과 FBI는 6개 팀을 구성했다. 3개 팀이 맨해튼을 급습하기로 했다. 라자라트남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한 팀, 대니얼 치에이지가 살고 있는 써튼 플레이스에 한 팀, 그리고 쿠마르가 살고 있는 타임워너 센터로 나머지 한 팀이 가기로 했다.

맨해튼에서 3명을 동시에 체포하는 것이다. 다른 2팀은 대기 상태에 있다가 치에이지의 반응에 따라 다른 2명을 체포할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다른 2명이란 IBM의 부사장인 로버트 모팻과 헤지펀드 뉴캐슬의 공동 설립자이며 대표인 마크 커랜드였다. 마지막 여섯 번째 팀은 서부가 새벽이 되었을 때 라지브 고엘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2009년 10월 16일 새벽 6시, B. J. 강을 포함한 몇 명의 FBI 수사관들은 라자라트남을 체포하기 위해 맨해튼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그는 써튼 플레이스에 있는 타운하우스에서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라자라트남의 집 도어벨을 눌렀다. 그 시간 라자라트남은 창문 밖으로 이스트 리버를 바라보면서 바이크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FBI 수사관들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라자라트남에게 수갑을 채워 끌고 나왔다. 라자라트남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FBI 수사관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그를 태워 FBI 뉴욕 본부로 압송했다.

오전 10시경, 라자라트남의 체포 소식이 CNBC를 비롯해서 뉴스 채널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갤리언의 직원들은 충격 속에서 대형 TV 화면을 통해 그들의 보스가 FBI 수사관들에 의해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긴급 뉴스를 보고 있었다. 갤리언 사무실은 공포에 휩싸였다.

직원들은 이제 무슨 일이 닥칠지 사내 변호사에게 물었다. 다음 수순은 분명했다. 라자라트남의 체포 소식에 신경이 곤두선 투자자들은 갤리언 펀드에서 돈을 인출할 것이다. 기관투자자들의 경우 불법행위를 저지른 펀드에 돈을 더 이상 투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더더욱 펀드에 어떤 법적인 책임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갤리언 펀드의 해체가 눈에 보였다. 갤리언 사무실에는 전화가 빗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갤리언은 2008년 금융위기의 쓰나미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라자라트남의 체포는 갤리언을 확실하게 격침시킬 것으로 보였다.

라자라트남이 체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 남부지검은 2개의 공소장을 공개했다. 하나는 CC-1, 즉 라자라트남, 쿠마르, 고엘을 공동 피고인으로 하는 소송이었고, 다른 하나는 CC-2, 즉 치에이지, 모팻과 커랜드를 공동 피고인으로 하는 소송이었다.

‘CC’는 ‘Co-Conspirator’의 약자로 ‘공동 공모자’라는 뜻이다. 이와 동시에 SEC는 이들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SEC와 뉴욕 남부지검이 함께 조사를 진행하지만, SEC는 민사소송을, 뉴욕 남부지검은 형사소송을 제기한다. 그들은 대부분 소송을 동시에 제기한다.

SEC와 뉴욕 남부지검은 곧 다가올 소송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들은 다가오는 재판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다. 여기에 맥킨지가 도움을 제공했다.

맥킨지는 선임 파트너 중 한 사람인 쿠마르가 체포당함으로써 회사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쿠마르를 무기한으로 정직시켰고, (그는 한 달 반 후 완전히 맥킨지를 떠났다.) 즉시 쿠마르의 범죄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 팀을 꾸렸다. 쿠마르가 체포된 지 한 달이 못 된 11월, 맥킨지의 자문 로펌인 크래바스 스웨인 앤 무어의 변호사들이 뉴욕 검찰청을 방문했다.

비록 맥킨지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회사는 고위급 임원에 대한 감독 책임과 연관해서 책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은 엔론 사태 때 아서 앤더슨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정부는 맥킨지를 기소할 것인지 여러 조건들을 따져 보고 있었고, 맥킨지는 정부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빨리 움직여야 했다. 크래바스의 변호사들은 쿠마르와 관련된 많은 이메일과 서류들을 싸들고 왔다. 거기에는 깜짝 놀랄 만한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맥킨지와 크래바스의 변호사들은 만주 다스에 대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만주 다스는 쿠마르의 가정부였다. 쿠마르가 모건스탠리에 계좌를 열 때 다스 계좌의 돈에 대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다스가 인도에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맥킨지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왔다.

맥킨지는 이민국을 통해 그녀가 쿠마르의 가정부로 미국에 입국했다는 이민 카드를 발견했다. 연방 검찰은 처음으로 라자라트남에게서 나간 돈이 어떻게 쿠마르에게 이동했는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쿠마르를 내려칠 수 있는 커다란 망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쿠마르는 연방 정부가 가진 강력한 증거 앞에 저항을 포기하고 정부에 협력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의 협력은 라자라트남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남아시아계의 동맹군이었고 와튼 스쿨의 친구였던 그는 법정에서 라자라트남에게 어떤 내부정보를 어떻게 제공했는지에 대해 진술했고, 라자라트남의 갤리언 호는 쿠마르의 무서운 증언으로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