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에 특별한 기운을 지닌 곳이 있다. 바로 무악동에 있는 ‘선바위’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선바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무악동은 종로구에 위치한 지역이며 면적은 0.36㎢, 현재 약 3000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안산, 북쪽으로는 인왕산이 있다. 동쪽으로는 경복궁 가는 방향으로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서대문 방향으로의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다.

毋岳洞 무악동이라는 한자의 뜻으로는 ‘아니다 무’ 그리고 ‘험악한 악’이다. 이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서대문구 현저동(峴底洞) 일부를 종로구에 편입할 때 무악고개(毋岳峴)에 있다고 해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에겐 3호선 무악재역으로도 친숙하다.

이 무악동에는 명물이 있는데 하나는 선바위다.

선바위는 서울특별시 시도민속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바위는 국사당 바로 위에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참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한다. 높이는 약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쯤 되는 바위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이 선바위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태조를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대립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선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성 밖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로 왕사(王師)인 무학과 문신인 정도전이 대립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선바위를 성 안으로 넣으면 불교가 왕성해 유신(儒臣)이 물러날 것이고 밖으로, 내놓으면 승려가 맥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너무나 강경해 태조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안쪽으로 성을 쌓은 자리만 눈이 녹아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해 선바위를 밖으로 내놓고 성을 쌓았다. 이에 무학이 “이제 중이 선비의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 뒤부터 눈 설 자를 써서 한양 도성을 설성(雪城)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으며, 그 바위는 선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도시풍수적으로 왜 무학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도성 근처 인왕산은 명당이다. 올라서 내려다보면 도성이 한눈에 보이고 위로는 북한산과 맥을 잇는다. 북으로 더 타고 올라가는 기운도 서려있다. 특히 풍수에는 간산(看山)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생기가 모인 혈(명당)을 찾으러 산에 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엔 사람들의 에너지가 모이게 되는데 인왕산이 바로 사람들이 가는 간산이다. 그래서 이곳엔 굿터도 많고 제도 많이 지냈으며 굿터와 절터는 현재까지도 많이 모여 있다. 그런데 이곳에 하나의 결정체가 있는데 바로 장삼을 입고 참선하는 스님 모습의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 개국 시 상당한 상징이었다. 조선역사에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상징이 될 수 있는 형체인 것이다. 정도전은 당연히 이를 반대했을 것이다. 권력이 왕에게 집중하는 것을 반대한 정도전은 유학자들이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반대했다. 그리고 무학대사는 이를 예견한 것이다. 무학대사는 1356년 중국에서 귀국해 고려 말 쇠락하는 불교를 비판했고, 이성계를 만나 그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무학도사는 관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1392년 이성계의 혁명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지상(地相) 즉 땅의 모습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했으며, 조선 건국 초기 나라가 안정하고 정착하는 데 헌신했다. 특히 무학대사는 유교를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에서, 불교인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즉 이런 업적을 가진 무학대사에게 선바위는 정말 의미 있고 중요한 명물이었던 것이다.

이 선바위는 다행히 아직 무악동에 남아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미 500년이 흘렀건만 이곳은 참선하는 스님의 마음과 달리 평화롭지 못하다. “무학대사의 바람처럼 이 선바위를 성 안으로 옮긴다면 그땐 과연 평화가 올 것인가”하는 마음으로 이번 글을 마치고 무악동을 다음에 이어 연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