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합의안 큰 표 차 부결

2019년 11월 15일, 영국 의회에서 브렉시트 합의안이 부결됐다. 하원의원 639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찬성이 202표, 반대가 432표로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영국 총리실은 투표 결과를 수용하고, 늦어도 오는 21일까지 대안을 제시할 거라고 밝혔다.

현재 예상되는 대안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브렉시트를 강행하기 위한 두 번째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브렉시트를 주도해온 집권 보수당의 신임을 묻는 조기 총선이다. 물론 국민투표나, 조기 총선을 위해 EU에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할 수도 있다.

이 상태로 3월 29일부터 브렉시트를 실행하면, 영국은 ‘노딜 브렉시트’로 돌입한다. 영국과 EU가 맺은 합의안을 하원의회가 반대했으니, 결국 일단 예정된 날짜에 브렉시트부터 맞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국은 EU는 교역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합의안에 동의하는 브렉시트로 진행되어도, 영국의 경제적 손실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노딜 브렉시트로 전개된다면, 영국의 피해는 아예 전망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영국 재무부는 노딜 브렉시트의 경우, 15년 뒤 영국 GDP는 최대 9.3% 감소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수준의 경제적 후퇴가 야기될 수도 있다.

노딜 브렉시트에 대비해서, EU는 시민권, 금융상품 판매, 세관 신고, 항공여행 등 14개 분야의 대책을 제시했다. 또 EU 회원국에 거주하는 영국 국민에게 거주권과 사회보장제도에 대해 동등 권리를 인정할 것을 권고했다. 영국 국민은 EU 국가에 대한 이민자이므로, 거주권과 사회보장제도에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국 발 제3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 9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유럽연합을 처음 제안했다. 유럽연합이 ‘전쟁 종식’과 ‘경제 번영’이라는 유럽인의 꿈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처칠의 제안으로 유럽연합은 논의되었다.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발족되었고, 5년 뒤인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1년 뒤 1958년 유럽원자력공동체(EEAN)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7년 7월 1일, 이 세 기구가 결합해서 유럽공동체(EU)가 완성되었다. 유럽을 하나로 묶겠다는 처칠의 제안이 18년 만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유럽연합을 결성하고 보니, 영국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였다. 1976년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얻어다 쓴 영국은 기진맥진 상태였고, 유럽연합의 주도권은 독일이 쥐고 흔드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의 군수물자를 독일로부터 조달받았고,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독일은 재기했다.

독일보다 2천만 명이나 적은 영국은 인구 경쟁력은 물론, 경제력으로도 독일에 뒤졌다. 영국은 석탄과 철강 소비를 위해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제안했지만, 1970년대부터 세계 산업표준은 전환되었다. 석탄과 철강 소비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유럽은 1959년부터 유레일이라는 철도공동체로 묶였다. 도서국가 영국은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 하나로 결합하는 유럽공동체에 결합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증기기관 발명을 통해 처음 기차를 만든 영국, 유럽연합을 제안한 나라도 영국이었다.

하지만 1993년 1월 1일 창립을 앞두고, 영국은 EU 가입을 주저했다. 영국 총리 대처 인구 경쟁력에서 뒤지고, 대륙에서 고립된 영국이 EU를 주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파운드화 유지를 주장했고, EU 가입을 반대했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EU 가입을 관철시켰고, 1990년 11월 28일 11년 총리 대처는 반대파에 밀려 사임했다.

2019년 3월 29일로 예정된 브렉시트는 대처 총리의 EU 가입 반대를 반대한 결과이다. 브렉시트는 단순히 영국의 탈EU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26년간 유지된 EU 질서를 전복하는 파행이다. 브렉시트에 이어, 프렉시트, 이탈렉시트까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EU 맹주 독일은 브렉시트를 영국의 도발,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해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그리스 방문

2019년 1월 10일, 메르켈 총리가 갑자기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했다. 메르켈 총리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와 만나서, 그리스의 구제금융 체제 이후의 양국 관계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재정난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몰려 구제 금융을 받고 있던 2014년,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를 방문했다. 메르켈 총리의 그리스 방문은 5년만이다. 치프라스 총리는 회담 후 “게으른 그리스인과 엄격한 독일인이라는 고정관념은 끝났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독일과 그리스 사이의 협력은 향후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메르켈 총리에게는 “지난번 방문 때는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이며, 지금 당신이 방문한 곳은 다른 그리스, 엄청난 고난 뒤에 금융위기를 극복해낸 그리스다.”라고 설명했다. 치프라스 총리의 자신감이 엿보인다.

메르켈 총리는 “이번 방문과 내가 할 일의 목적은 그리스가 재기해 시장에서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은 3차례에 걸친 그리스의 구제금융 기간 중 개별 국가로는 가장 많은 돈을 그리스에 빌려줬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독일은 연금과 임금 삭감, 세금 인상 등의 강력한 긴축을 요구했다.

2010년부터 8년간의 구제 금융 기간 동안, 그리스는 재정지출을 큰 폭으로 삭감했다. 경제 규모는 4분의 1 줄었고, 국민 3분의 1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결국 28%까지 치솟던 실업률은 19%로 내려갔다. 2018년 8월, 그리스는 구제 금융을 졸업했다.

회담 중에, 메르켈 총리와 치프라스 총리는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들어오는 난민문제와 마케도니아의 국호 변경 등 역내 주요 현안에 대한 의견도 교환했다. 그리스는 이탈리아, 스페인과 함께 유럽행 이민자들의 주요 유입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민 정책과 관련, 그리스는 이제까지 살기 위해 메르켈 총리와 같은 입장을 취해왔다.

 

메르켈 총리의 집안 단속, 그리고 탈EU 도발국 영국에 대한 경고

아테네를 방문 중인 메르켈 총리는 무명용사의 비에 헌화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지가 그리스에 끼친 고통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자 이어 열린 정상회담에서, 파블로 풀로스 그리스 대통령은 나치 과오에 보상으로 수십 억 유로를 요구했다.

2015년, 그리스 의회는 나치 점령으로 372조 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독일은 1960년 그리스에 1억 1,500만 마르크를 지불해서, 배상이 완료됐다는 입장이다. 그리스의 요구에 대해서, 메르켈 총리는 양국 관계의 중요성만 강조하며, 언급을 피했다.

노딜이든, 딜이든 3월 29일 결행될 브렉시트를 80일 앞둔 2019년 1월 10일,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를 방문했다. 그리스의 구제금융 졸업 축하를 위한 친선 방문으로 보기에는 5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뜬금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전격 방문이었는데, 그리스는 한 술 더 떠 메르켈 총리에게 이미 해결된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메르켈 총리는 왜 그리스를 방문해서, 그리스의 요구를 듣고 있었을까? 혹시 브렉시트가 EU를 흔드는 총성 없는 제3차 세계대전이며, EU가 해체되면 EU 회원국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영국에 엄포를 놓은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영국은 제3차 세계대전 도발국이다. 메르켈 총리는 지금 EU 집안 단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