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기계에 비유하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요즘 딥러닝 기술들을 사용하는 기계들이 인간을 능가하는 성능을 내고 성인 로봇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하면서도 인간이 시계나 자동차, 컴퓨터 등과 같은 종류의 기계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관련된 연구를 하는 공학이나 인문사회학의 전문 연구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학문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격렬히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을 기계라는 것은 명백히 유물론적이고 물리주의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물리적인 토대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고 물리적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 세상에 대한 이해에서 영혼이나 천사와 같은 비물리적인 존재는 제외되고 감정이나 자유의지와 같은 것들도 물리적인 환원의 대상이다. 이러한 주장도 인간이 자동차나 컴퓨터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 물리적인 토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계라는 말은 물리적인 토대 위에 복잡한 작용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점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도 생물기계이고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는 인간도 언어기계라는 것이다. 물리주의자들과 달리 생물학자들은 생물은 유기체적여서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고 사회학자들은 인간이 사회적여서 유기체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한다(참고 1). 다른 말로 하면 생물은 물리적 토대에서 창발한 것이고 사회는 생물적 토대에서 창발한 것이라고 한다. 창발은 전체를 이루는 개별 구성요소의 성질로 환원되지 않는 성질이 나타나는 것이다.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가 결합한 물은 각각의 수소원자에도 산소원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고 블럭들로 만들어진 장난감 집도 장난감 자동차도 각각의 레고 블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관찰과 설명의 수준에 따라 생물도 사회도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세상(인간 자신을 포함한)에 대한 모든 지식은 관찰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현재까지 믿고 있는 정보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세상에 대한 잠정적이고도 부분적 모델링(Tentative And Partial Modeling)일 뿐이며, 이러한 지식조차 다르게 관찰하고 다르게 표현하는 문화나 사람에 따라 다르고 심지어 한 사람의 생각에서조차 모순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소위 과학주의를 표방하는 물리주의도 완벽한 지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념체계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점에서는 종교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리주의자들의 신념은 세상이 관찰 가능하고 실험 가능하고 설명 가능한 것만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므로 물리주의자들은 세상에 알 수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물리주의자들은 과학적이라고 부르는 방법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세계를 만들어왔다고 믿는다. 이러한 물리주의자들이 말하는 기계는 어떤 수준에서든 개체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기능하는(사용되는) 물리적 집합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적인 구성요소들의 집합체인 생물(유기체)이나 생물들의 집합체인 사회도 기계다. 그리고 그 특정한 방식이 물리주의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생물이면서 사회를 이루지만 의미를 다루는 추상적인 언어를 가지게 됨으로 복잡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언어는 욕망하는 생물과 그들의 집합체인 사회 사이의 접점이 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면서도 그 집은 감옥이 된다. 물리주의자에게 그 집/감옥은 물리주의적 언어다. 물리주의자는 자신을 포함한 세상을 물리적 언어로 관찰하고 물리적으로 개념화한다. 인간이 유전자 프로그래밍에 의한 기계적 존재이더라도 의식의 성찰적 언어를 통해 이 모든 세상을 이해하려는 과학과,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예술과, 영혼을 흔드는 사랑과, 공존을 위한 정의와 윤리를 위해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를 통해 단순한 생존 기계 이상의 존재가 된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모두 ‘인간은 기계’라고 하는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장은 인공지능과 무관하게 등장한다. 라메트리가 그랬고 시몽동이 그랬고 라캉이 그랬고 들뢰즈가 그랬다. 이러한 수탉의 나라 사람들과 같은 문파라고 할 수 있는 유물론 자체는 고대에도 있었다. “최초의 유물론자 중의 한사람인 에피쿠로스는 마르크스의 박사논문 주제였다.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의 정의와 자유를 향한 열정, 부의 추적에 대한 혐오, 여성에 대한 계몽적 태도, 인간의 감각적 본성을 진지하게 다루는 태도를 존경했다. 에피쿠로스에게 유물론은 계몽사상과 마찬가지로 성직자들의 교활한 술수와 미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스피노자와 같은 급진적 유물론의 입장에 서면 “정신의 영역을 반박하는 것은 빈곤과 불의를 바로 잡는 일이 종교적인 문제들 때문에 방해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 중략 ~ 인간을 전능자와 동일한 물질세계의 일부로 봄으로써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범신론자 스피노자의 견해는 그렇다. 이처럼 유물론과 인본주의는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한 쌍이다.”(참고 2, p16-17).
물리주의자에게 세상은 모든 것이 물질로 이루어진 것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 귀한 것도 더 천한 것도 없다. 물리주의자에게 인간을 포함한 세상은 기계이고 기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 이해하고 많은 생물기계들이 모두 공존할 수 있도록 세상이라는 기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상이 물리적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기계의 탐욕이 여지까지 그런대로 잘 돌아가는 지구라는 세상을 파괴해 공멸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물리주의자가 인간도 기계이고 세상도 기계라고 하는 것은 좀 더 세상을 잘 이해하기 위한 신념이고 여전히 음악은 아름답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고, 좀 더 나은 앎을 추구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기계지만 오히려 괜찮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여자 주인공 영군은 인간이지만 자신을 ‘싸이보그(Cyborg)’라고 생각한다. 싸이보그는 인간과 기계가 결합된 개체를 의미하므로 영화 내용상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이라는 의미의, 안드로이드(Android)라고 하는 것이 맞는 용어이긴 하다. 영화상에서 싸이보그로서 버려야 할 칠거지악(七去之惡, 1. 동정심 금지, 2. 설렘 금지, 3. 죄책감 금지, 4. 쓸데없는 망상 금지, 5. 망설임 금지, 6. 슬픔 금지, 7. 감사하는 마음 금지)은 인간기계에게 결코 버려질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것들 때문에 같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고 1] 에른스트 마이어, <이것이 생물학이다>, 최재천, 고인석, 김은수, 박은진, 이영돈, 황수영, 황희숙 (역), 바다출판사, 2016.
[참고 2] 테리 이글턴, <유물론>, 전대호(역), 갈마바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