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2월 27일,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는 독립운동가이자 공산당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수카르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정권을 잡고 이내 독재자로 변모한 그는 1965년 9월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오히려 군부에 의해 진압당하고 만다. 이후 그를 끌어내린 군부의 핵심인물 하지 무하마드 수하르토는 1968년 3월에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1998년까지 약 30년간 독재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군부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우려한 서구 열강의 묵인 아래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한다.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학살로 강과 하수도는 매일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했을 지경. 군부는 이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은 무고한 소작농과 화교, 지식인, 그리고 자신들의 정적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야자수 농장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노동조합 탄압 문제를 다루려고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사람들이 노동조합 설립을 이상할 정도로 두려워 한다는 것을 느끼고, 그 이유를 확인하다 1965년의 비극을 알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학살을 주도한 자들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한 탓에 진술하기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침묵의 시선>이 개봉되었다.)

이후 그는 방향을 180도로 전환한다. 바로 ‘가해자’들을 인터뷰하겠다는 것. 그는 학살에 가담한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한 영화를 찍자고 제안한다. 그 과정을 메이킹 다큐멘터리로 만든 결과물이 바로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이다.

영화 제작을 제안 받은 사람, 아니 가해자들의 반응은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울 지경이다. 신이 나서 그들 스스로 팀을 짜고 촬영과 편집, 관람을 이어가기 때문.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다’며 극찬하는 것은 예사다. 자신들이 자행한 살인 방법을 상세하게 재연하고, 학살을 저지른 마을을 찾아가 주민들에게 아이를 잃은 부모 역할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 격인 안와르 콩고는 이중적이며, 모순적인 인물이다. 춤과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고, 다리를 다친 오리를 불쌍히 여기는 인자한 할아버지이며, 대학살을 저지른 이후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1965년 대학살의 주범이며, 자신이 저지른 일을 당당히 증언하고, 태연하게 그 일을 재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와 그의 동료, 아니 또다른 가해자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잠시 눈을 돌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에 열린 어느 재판을 살펴보자. 피고인의 이름은 아이히만, 그는 나치 정권 하에서 유대인 문제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세 단계에 걸쳐 처리했다. 첫 번째 단계는 강제 이주.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주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곧 이어 그는 다음 해결책을 제시했다. 바로 강제격리 조치로 주민들과 섞여 살던 유대인을 전부 솎아 제한된 지역에 몰아넣은 것이다. 성공적인 두 번째 조치 이후, 세 번째 조치가 이뤄졌다. 바로 이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 말살시키는 것. 나치는 이 단계를 ‘최종 해결책’이라고 명명했다. 아이히만이 전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나치에 부역하며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는 정신이상자 혹은 전쟁 미치광이였을까? 아니,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재판 직전 그의 정신이상 여부를 검사한 한 의사는 ‘아이히만을 감정한 자신이 오히려 정신이상자가 될 정도로 그는 정상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재판장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일 역시 국가 공무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장면을 직접 지켜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홀로코스트와 인도네시아의 대학살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가장 끔찍한 지점 역시 이 부분이다. 바로 우리를 경악케 한 두 사건 모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행동한 결과 저질러진 일이라는 점 말이다.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지칭한다. 다시 말해, 악이란 특별히 악한 존재 혹은 무언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무사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는 성실한 (그래서 더 잔인한) 악이 될 가능성을 늘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편,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을 끊임 없이 점검하고, 이와 상충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고민하고 사유해야 한다.

<액트 오브 킬링> 속 출연자들이 스스로 만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희생자를 연기하는 인물은 주인공 안와르 콩고에게 금메달을 걸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날 처형하고 천국으로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드리는 메달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는 누군가의 악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를 무사유와 성실함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