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동규 기자] 국내 정유사들의 석유화학사업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정유사가 전통 석유화학회사들의 주 설비인 NCC(납사크래킹센터) 설립을 발표하는 등 석유화학포트폴리오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유사들이 화학사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 때문이다. 정유사업만으로는 불확실성이 큰 유가변동과 같은 대외 리스크에 재빠르게 대응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 정유사들이 석유화학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중이다. 출처=각사

석유화학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화학사업이 정유사들에게 얼마나 효자인지는 올해 3분기 정유사 실적을 보면 알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3분기 영업이익 8359억원 중 41%인 3455억원이 석유화학사업에서 나왔다. GS칼텍스도 영업이익 6360억원의 21.7%인 1384억원이 석유화학에서 발생했다. GS칼텍스의 석유화학 영업이익은 직전인 2분기보다 130.9%나 증가한 수치다. 에쓰오일(S-Oil)역시 영업이익 3157억원 중 32.3%인 1021억원이 석유화학으로부터 발생했다.

정유사 석유화학사업에서 주로 생산되는 제품은 파라자일렌(PX)이다. 원재료가격과 제품가격의 차이를 뜻하는 스프레드가 PX부문에서 강세를 보여 정유사 석유화학사업의 영업이익에 크게 도움이 됐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PX공장에 대한 선제적 투자와 PX시황 호조가 3분기 견조한 영업실적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GS칼텍스 관계자도 “석유화학부문의 성장세가 눈에 띄는데 이는 PX마진 상승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통 석유화학업체 영역까지 침투...왜?

정유사들이 석유화학사업을 통해 생산하는 주력 제품은 PX고, 석유화학업체들은 주로 에틸렌이나 프로필렌을 주력으로 생산한다. 이런 이유에서 정유사와 석유화학사는 석유화학에서 제품이 중복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정유사들이 대거 NCC신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석유화학사들과의 경쟁에 본격 나서기 시작했다. NCC는 납사(Naptha)분해시설로 석유화학사의 주된 설비다.

에쓰오일은 올해 8월에 에틸렌과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스팀 크래커’와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올레핀 다운스트림’시설 투자를 결정했다. 총 투자액은 5조원이고 가동이 시작되는 시점은 2023년으로 잡혀 있다.

GS칼텍스도 올해 2월에 2조 6000억원을 투자해 연간 에틸렌 70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올레핀 생산시설 설립을 결정했다. 현대오일뱅크는 5월에 롯데케미칼과 합작해 연간 에틸렌 75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2021년까지 짓기로 결정했다.

SK이노베이션은 정유사중 유일하게 1970년대부터 NCC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국내 NCC신규 증설은 당분간 없을 것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유사들이 석유화학사들만 생산했던 제품까지 생산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다. 정유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유를 가공해 제품을 만들었을 때 발생하는 수익인 ‘정제마진’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제마진은 원유가격에따라 차이가 크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크다. 이런 이유에서 정유사들은 다른 사업군을 만들어 대외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수익성에서도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시도를 계속해 왔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전통 정유사들은 정유사업만으로는 성장이 한계에 이를 것으로 보기 때문에 먹거리 확보차원에서 석유화학사업도 함께 하고 있다”면서 “정유사는 석유화학제품의 원재료인 납사를 직접 생산할 수 있어 수직계열화 차원에서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에쓰오일 관계자도 “석유화학사업은 납사를 활용해 고부가가치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면서 “석유화학사들의 주력 품목인 에틸렌생산까지 정유사들이 뛰어든다는 것은 정유사와 석유화학사의 경계를 없앤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LG화학 여수 NCC. 출처=LG화학

전통 석유화학사들 위기 찾아오나?

정유사들의 석유화학사업 확장은 석유화학사업이 주력인 회사들에게는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 갈까. 일각에서는 두 업계의 제품군이 겹쳐 공급량이 늘어나면 공급과잉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석유화학사들도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통해 정유사들의 침투에 대응하고 있다.

최홍준 석유화학협회 과장은 “현재 석유화학사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가 정유사들보다는 더 많기 때문에 정유사들의 화학사업 확장이 당장은 위협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수십년간 쌓인 노하우와 경험 측면에서 석유화학사들이 정유사보다는 더 앞서 있다”고 말했다.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가져가는것도 석유화학사들의 생존전략이다. LG화학 관계자는 “전통 석유화학사업의 경쟁력 강화와 동시에 배터리 사업과 같은 신성장동력을 계속 키워 나가고 있다”면서 “외부요인들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사의 석유화학사업 진출로 전통 석유화학사들이 크게 위협받는다고 보지는 않는다”면서 “롯데케미칼은 정유사인 현대오일뱅크와 합작으로 에틸렌 생산을 결정한 만큼 양 업계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