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글로벌 경제를 출렁이게 만들었던 미중 무역전쟁의 총성이 90일 동안 멈추게 됐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1일(현지시간) G20 회의가 열렸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성명을 발표해 "미국과 중국은 90일 동안 지식재산권 보호와 비관세장벽, 사이버 침입, 절도 등 문제에 대한 구조적인 변화를 위한 협상에 나설 것"이라면서 지난 9월24일부터 20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부과하고 있던 관세율 10%를 내년 1월1일 25%로 인상하려던 계획을 보류한다고 밝혔다.

G20 회의가 열리는 동안 각 국 주요 정상들은 보호무역과 지구 온난화 등 문제를 두고 미국이 민감해하는 이슈는 공동성명에 담지 않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체면을 살려주는 행보를 보였다. 그 연장선에서 미중 무역전쟁의 극적인 변곡점이 나왔다는 평가다.

글로벌 경제계는 미중 정상의 극적인 합의를 두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미국이 중국의 기술굴기를 견제할 가능성은 여전하기 때문에 이번에 합의된 90일 휴전은 소위 '유리공 던지기 놀이'처럼 불안한 것이 사실이지만, 두 나라가 서로를 향한 공격을 한시적으로 멈추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시간은 벌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나아가 ICT 업계는 90일 휴전과 동시에 제기된 퀄컴과 NXP 합병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야망은 무위로 끝났다. 출처=갈무리

퀄컴, 미중 무역전쟁의 바로미터

중국 화웨이와 ZTE가 미중 무역전쟁의 파도로 출렁이는 중국 측 바로미터라면, 퀄컴은 미국 측 바로미터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퀄컴은 미중 무역전쟁이 극적인 변곡점을 돌 때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퀄컴은 어윈 제이콥스 전 회장이 창업했으며, 최근까지 아들인 폴 제이콥스가 이끌어 왔다. 회장에 오른 폴 제이콥스는 퀄컴 주도의 5G 시대를 이끄는 등 상당한 업적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전은 지난해 11월 벌어졌다. 싱가포르 기업인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애플과의 지난한 전투로 허덕이던 퀄컴의 틈을 놓치지 않은 셈이다.

브로드컴은 미국의 반도체 회사로 출발했다. 1991년 UCLA 출신인 헨리 사무엘리와 헨리 T. 리콜라스 3세가 창업했으며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시스템 반도체 업계의 강자로 꼽힌다. 다만 지금의 브로드컴은 싱가포르의 아바고가 인수하며 구 브로드컴과 나눠진다. HP의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한 아바고가 지난해 브로드컴을 인수하며 아예 사명을 브로드컴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브로드컴의 야망은 최근 벌어지는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실제로 반도체 업계는 2015년 NXP의 프리스케일 인수, 2016년 소프트뱅크의 암(ARM) 인수 등 굵직굵직한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초연결 사물인터넷 시장의 성장으로 메모리 반도체 슈퍼 사이클(장기호황)이 도래하는 한편, 시스템 반도체 사업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대목도 반도체 업계의 합종연횡을 촉발시키는 이유다.

브로드컴의 '작업'은 주도면밀했다. 본사를 아예 미국으로 옮기며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샀으며, 적대적 인수합병 방법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사용했다는 평가다. 지난해 인수합병을 마무리한다는 뜻을 숨기지 않으며 퀄컴과 인수대금을 두고 줄다리기를 시도하는 한편, 이사회를 하나씩 장악해갔다.

브로드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으나, 브로드컴의 본사 미국 이전을 두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막판에 제동을 걸며 상황이 꼬였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미국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가 나서며 두 회사의 합병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미국으로 본사까지 이전하는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소망도 끝나고 말았다.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가 막힌 이유는 다양하지만, 업계에서는 당시 수입 철강 등에 관세를 대거 올리며 전 세계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 무역주의의 일환으로 싱가포르 기업인 브로드컴의 미국 기업 퀄컴 인수를 막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 중화권 싱가포르 기업인 브로드컴의 미국 기업 퀄컴 인수를 막았다는 뜻이다. 퀄컴은 특유의 라이선스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는 등, 핵심 ICT 기술력을 다량 보유한 기업이기도 하다. 중국의 기술굴기를 우려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이 '브로드컴 야망 좌절'로 이어진 결정적 이유다.

퀄컴은 트럼프 행정부의 ZTE 제재 국면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2017년 3월 이란과 북한에 대한 수출 금지령을 위반했다는 혐의가 적용된 ZTE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월 고강도의 규제를 발표한 가운데,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퀄컴의 제품 중 최대 10%가 ZTE에 판매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다이제스트 ICT는 4월20일 "미국 정부의 제재는 현지 기업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면서 "특히 퀄컴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중국의 칩 기술력은 미국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으나 최근 막대한 자금력으로 간격을 빠르게 좁히는 중이다. ZTE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이 미국 기업과 거래를 하지 못하면 당분간 상당한 타격이 예상되지만, 자본의 힘을 통해 미국 기업을 추월할 수 있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ZTE만큼 퀄컴이 받는 타격도 극대화된다. 다행히 트럼프 행정부가 ZTE에 대한 규제를 조건부로 풀어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퀄컴 입장에서는 분명한 위기였다.

▲ 퀄컴의 NXP 인수 재추진설이 나오고 있다. 출처=갈무리

NXP 인수 어떻게 될까?

퀄컴이 오랫동안 인수를 타진하던 NXP 인수도 미중 무역전쟁의 파도를 피할 수 없었다.

퀄컴은 지난 2016년 NXP를 470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때 삼성전자도 인수합병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NXP는 필립스의 부품 사업부에서 독립한 곳이며 자동차 반도체 업계의 강자다.

CDMA를 바탕으로 3G 시절 막대한 라이선스 수익을 올리던 퀄컴은 현재에 이르러 스냅드래곤의 모바일 AP로 모바일 시대를 호령하는 강자다. 하지만 독자 모바일 AP를 제작하는 곳이 많아지는 한편 시장 자체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기에 이르렀고, 이 지점에서 NXP에 손을 내민 셈이다.NXP는 차량 반도체 사업의 강자이며 퀄컴 입장에서는 모바일 시장을 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단숨에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더불어 모바일 및 5G, 자동차 반도체 등 사물인터넷 시대의 중요 핵심 인프라를 모두 빨아들일 수 있는 기회도 잡았다는 평가도 나왔다.

문제는 각 국 반독점 심사 당국의 승인 절차다. 퀄컴이 NXP를 인수하려면 한국과 유럽, 일본 등 9개 나라의 반독점 당국 심사를 받아야 하며 중국을 제외한 8개 나라는 일찌감치 승인을 완료했다. 1조원 규모의 과징금을 두고 설전을 벌인 국내 공정거래위원회와도 대화의 끈을 이어갔다. 공정위는 결국 퀄컴이 NXP 반도체 인수에 돌입하면 NXP 반도체가 보유한 필수특허를 제3자에게 매각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4개 시정조치를 내리며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중국은 퀄컴의 NXP 인수 승인을 미뤘고, 결국 퀄컴은 지난 7월 300억달러의 자사주를 매입하는 선에서 NXP와 결별한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중 무역전쟁과 별도로 중국에 퀄컴의 NXP 인수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지난 6월15일 중국 당국이 퀄컴의 NXP 인수를 승인할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를 하자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미국과의 통상전쟁이 롤러코스터를 타며,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기업 ZTE에 대한 제재안을 일부 완화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중국은 끝내 승인을 하지 않았고, 퀄컴은 NXP를 포기했다.

반전은 이번 미중의 극적인 합의다. 90일의 휴전이 선언되며 백악관이 직접 퀄컴의 NXP 인수 재추진 가능성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시진핑 중국 국가 수석은 승인되지 못했던 퀄컴의 NXP 인수가 다시 검토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문제는 시 주석과의 발언과는 별도로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점이다. CNBC에 따르면 퀄컴은 이미 NXP에 인수합병 불발에 따른 중도계약해지금을 지불했으며, 현재 두 회사는 자사주를 서로 매입했다. 당시 리처드 클레머 NXP 최고경영자도 당분간 대규모 지분 거래에 나설 뜻이 없다는 점을 밝혔다. 이번 미중 회담을 계기로 퀄컴의 NXP 인수 재추진설이 탄력을 받고 있으나, 이미 끝난 '게임의 판'이라는 현실적인 난관은 여전하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