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하이더 와라이치 지음, 홍지수 옮김, 부키 펴냄

 

[이코노믹리뷰=최혜빈 기자] 현대 의학은 인간이 ‘생존할 능력’을 강화해준 동시에 ‘세상을 떠날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과학기술 덕분에 복잡한 전문지식을 갖춘 의사들은 그만큼의 권위를 지니게 됐고, 저자들은 이를 “의료계에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서가 판을 치게 됐다”고 설명한다.

1975년 일어난 ‘캐런 앤 퀸런(Karen Ann Quinlan)’ 사건은 이러한 문제를 재조명할 기회가 됐다. 미국 뉴저지의 여대생 캐런 앤 퀸런은 파티에서 알코올과 신경안정제를 함께 복용한 뒤 의식불명과 호흡정지 상태에 빠졌다. 사고 이후 그녀는 불과 몇 달 만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호흡기에 간신히 의존한 ‘식물인간’이 됐다. 그녀의 부모는 가톨릭 교구 사제와 상의해 딸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병원에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그해 캐런 부부는 딸의 죽을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는 기각됐다. 하지만 이듬해 항소심에서 ‘환자의 죽을 권리’가 인정되었고, 뉴저지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캐런 앤 퀸런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캐런 앤 퀸런은 인공호흡기 제거 후에도 10년간 생존했다. 물론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존엄사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오늘날의 이른바 ‘죽을 권리’라고 알려진 사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는 환자가 공식적으로 주치의와 의논하고 소생술을 거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심폐소생술은 심장이 정지했을 때 심장과 뇌에 산소가 포함된 혈액을 공급해주는 응급처치다. 심폐소생술은 생명을 되살리는 기적의 기술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권 유린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폭력적이고 섬뜩하며 특히 뇌손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환자들은 심폐소생술을 원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심폐소생술을 받아도 소용없을까 봐’가 아니라 ‘어설프게 효과를 발휘할까 두려워서’다. 심장학 전임의인 저자에게 한 환자는 “내 심장이 멈추면 그냥 보내주세요.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태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67년 생명윤리학자 헨리 비처를 의장으로 발족한 하버드 위원회는 1968년에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 ‘영구적으로 기능이 정지된 뇌’라는 말로 ‘뇌사’를 정의했다. 하지만 뇌사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아직도 복잡하고 모호한 상태다.

1994년 오리건주는 미국 최초로 ‘의사 조력 자살’을 합법화했다. 이는 안락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안락사는 환자의 조기 사망을 의사의 손으로 하는 행위지만, 의사 조력 자살은 환자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의사가 진정제를 처방하는 것이다. 환자의 자율권이 보장된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타인과 죽음에 대해 논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우리가 죽는 방식을 개선하는 데는 어떤 과학적인 혁신보다도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훨씬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른바 ‘죽음 긍정 운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인간적으로 대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죽음을 상기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스트레스가 적을수록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저자의 말은 일견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