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이웅열 코오롱 회장이 11월 28일 아침 사내방송을 통해 전격 사퇴 의사를 밝힌 가운데, 재계에서는 그의 신선한 행보에 집중하고 있다. 정체된 조직의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이 회장의 용단을 두고 ‘놀랍다’는 반응이 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다른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용단의 배경은?

이 회장은 “대표이사 및 이사직도 그만둘 것”이라면서 “경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회사에서 회장님으로 불리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6년 1월 나이 마흔에 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 딱 20년만 코오롱의 운전대를 잡겠다고 다짐했다. 나이 60이 되면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자고 작정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3년이 더 흘렀다”면서 “시불가실(時不可失). 지금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난다. 우물쭈물하다 더 늦어질까 두렵다”고 말했다.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되는 그의 갑작스러운 사퇴 배경은 크게 ‘제2의 인생’과 ‘조직의 활력을 위한 강수’로 좁혀진다. 이 회장은 “저보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한다. 누이들까지도 우리 집안에서 금수저는 저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니 말 그대로다.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살아온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의 무게도 느껴야 했다. 그동안 그 금수저를 꽉 물고 있느라 입을 앙 다물었다. 이빨이 다 금이 간 듯하다. 여태껏 턱이 빠지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밖에서 펼쳐보려고 한다. 새 일터에서 성공의 단맛을 맛볼 준비가 됐다. 이젠 망할 권리까지 생겼다”고 강조했다. 창업이라는 제2의 인생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그의 사퇴 배경에 조직의 활력을 위한 강수도 있음이 확인된다. 그는 “정말 빠르게 경영환경이 변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세상이 변하고 있고 변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이라면서 “그동안 코오롱호의 운전대를 잡고 앞장서 달려왔다. 이제 그 한계를 느낀다. 앞을 보는 시야는 흐려져 있고 가속 페달을 밟는 발엔 힘이 점점 빠진다. 불현듯 내가 바로 걸림돌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고 말했다. 용퇴를 통해 조직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겠다는 뜻이다.

이 회장의 말대로 현재 코오롱의 상황은 좋지 않다. 1996년 이 회장이 등장한 후 이듬해 서울 무교동에서 과천으로 본사를 이전하는 한편 1996년 19개에 불과하던 계열사도 2017년 기준 40곳으로 크게 늘어났으나 내실은 없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한때 재계 순위 19위까지 올라갔으나 지금은 30대 그룹에서 완전히 밀려난 형국이다. 올해 마곡으로 본사를 옮기고 인보사로 해외 진출에 성공하는 한편 이 회장의 아들 이규호 상무가 올해 1월 코오롱 자회사 리베토의 대표이사로 오르는 등 빠른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으나, 코오롱의 미래 행보는 스텝이 꼬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오롱의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이 회장이 용퇴라는 충격요법으로 조직의 쇄신을 끌어내려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 최태원 SK 회장은 최근 형제 및 친족들에게 지분을 증여했다. 출처=SK

재계의 신선함 계속될까

이 회장의 용퇴를 계기로 최근 재계에 부는 신선한 바람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다. 박근혜 정부 당시 재계는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며 큰 고통을 겪었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 재계의 쇄신 바람이 불고 있다는 평가다.

이 회장의 용단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재계 일각에서는 2017년 10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전격적인 사퇴로 후진양성의 뜻을 밝힌 대목과 맥을 함께 한다는 주장도 있다. 권 부회장은 당시 반도체를 중심으로 삼성전자가 역대 최고 실적을 거둘 때 용퇴를 선언,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조직의 쇄신이라는 하나의 목표만 염두에 둔 선택이며, 이웅열 회장의 행보도 이와 비슷하다는 평가다.

최근 재계에서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선함과 파격이 연이어 발견되는 장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는 무려 11년을 끌었던 반도체 백혈병 문제의 종지부를 찍었다. 삼성전자는 11월 23일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중재 판정 이행 합의 협약식’에서 반도체 백혈병 분쟁과 관련해 작업장 관리 및 해결을 위한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정식 사과했다. 지난 1일 발표된 중재안도 모두 이행될 전망이다. 극한의 대립만 이어지던 양측의 평행선이 삼성전자의 전격적 결단으로 극적인 변곡점을 돌아온 사례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중심의 파격적이고 신선한 4.0 경영이 시동을 걸었고, SK그룹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며 이전과 다른 대기업의 책무를 보여주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최근 형제 등 친족에게 SK㈜ 지분 329만주(4.68%)를 증여한다고 발표했다.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166만주)를 비롯해 사촌형인 故 최윤원 SK케미칼 회장 가족(49만6808주), 사촌형인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과 그 가족(83만주) 등 친족들에게 SK㈜ 주식 329만주를 증여하는 것이 골자다.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도 SK㈜ 주식 13만3332주(0.19%)를 친족들에게 증여하는 데 동참했다.

대주주 일가와 전문경영인의 공동 경영 체제로 움직이는 SK에서 최태원 회장의 지분 증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국내 대기업들이 미성년자인 자녀에게 지분을 물려주며 서서히 승계작업에 나서는 것과 달리, 최 회장의 SK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일반적인 국민이 대기업 총수 일가에 가진 선입견과는 온도차이가 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최근 재계의 연이은 파격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점도 거론하고 있다. 이웅열 회장의 코오롱이 이명박 정부 주요 인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등 약점이 많기 때문에, 이 회장의 용퇴 배경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