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장기간 미국은 물론 글로벌 테크 기업의 성지로 군림했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테크기업은 물론 스타트업도 실리콘밸리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과감하게 이동하는 분위기가 포착된다. 이유는 뭘까?

▲ 탈 실리콘밸리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출처=갈무리

비싼 물가 직격탄...아이러니한 기술의 발전
실리콘밸리는 글로벌 테크기업의 대명사이자, 오랫동안 혁신의 고향으로 여겨진다. 북미 전체에서 벤처캐피털 규모가 가장 큰 곳인데다 인재확보에도 용이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과 인재가 풍부한 것을 넘어 지방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유명하다. 팰러앨토에서 새너제이에 걸쳐 길이 48km, 너비 16km의 띠 모양으로 전개된 실리콘밸리는 12월부터 3월까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습기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전자산업이 일어나기에 이상적인 입지조건을 가졌다는 평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비전펀드를 설립하며 내건 '데저트밸리'라는 프레임도 실리콘밸리의 상징성에서 영감을 받았다.

글로벌 테크기업의 수도 정도로 평가받던 실리콘밸리지만, 최근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많은 기업들이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등 초연결 시대의 거점을 외부로 이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애틀에 본사를 둔 아마존은 뉴욕시 퀸스카운티 롱아일랜드시티, 수도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알링턴카운티 크리스탈시티에 제2본사를 설립하기로 했고 구글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행보를 탈 실리콘밸리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실리콘밸리의 명성이 예전같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버는 최근 자율주행차 거점을 실리콘밸리가 아닌 피츠버그 등으로 옮기고 있으며 페이팔 마피아의 수장 피터 틸도 올해 초 집과 사무실을 LA로 이전했다. 스타트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기업가치 10억달러가 넘는 스타트업 중 35%는 중국에 있고, 실리콘밸리에는 16%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실리콘밸리의 인구 유입도 둔화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정부에 따르면 2014년 1만5151명에 달하던 순증 이주민은 2017년 308명으로 뚝 떨어졌다.

테크기업에게 실리콘밸리의 매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지나치게 높은 물가와 ICT 기술의 발전이 원인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실리콘밸리 지역은 미국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지역이며, 주거 비용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이유로 대학을 졸업한 신입 인재들이 실리콘밸리에 근무하는 것을 꺼리는 문화가 생겼고, 기업들도 '미친 물가'를 감당하지 못해 이전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떠들썩 하게 만든 노숙자세 논란이 나온 결정적인 이유도 높은 물가에 있다. 실리콘밸리의 집값과 물가가 너무 올라 노숙자가 크게 늘어났고, 이에 샌프란시스코가 실리콘밸리 기업들에게 소위 노숙자세를 물리자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두고 세일즈포스의 마크 베니오프 창업자가 노숙자세 신설에 찬성하고 잭 도시 트위터 CEO가 반대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노숙자는 750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캘리포니아주 전체로는 13만명을 넘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리콘밸리의 높은 물가는 물론, ICT 기술의 발전도 탈 실리콘밸리를 유도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ICT 기술의 발전으로 화상회의나 분업, 재택근무가 용이해지며 굳이 실리콘밸리의 비싼 사무실에 직원들이 모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직접 직원들이 사무실에 만나는 것이 좋지만, 높은 물가로 허덕일바에야 원격회의를 택하며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기업들도 많다는 설명이다.

▲ 뉴욕의 전경이 보인다. 출처=픽사베이

대안 도시는 어디일까?
최근 테크기업들은 무작정 실리콘밸리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지역을 적극적으로 타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뉴욕이다.

미국 이커머스 기업 아마존은 13일(현지시간) 뉴욕시 퀸스카운티 롱아일랜드시티, 수도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알링턴카운티 크리스탈시티에 제2본사를 세운다고 발표했다. 무려 5만명의 일자리 창출을 내걸며 새로운 뉴욕 시대를 열겠다는 각오다. 구글도 뉴욕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2022년까지 맨해튼의 웨스트 빌리지(West Village)에 대규모 사무실을 마련하는 한편 8500명의 직원이 근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구글은 지난 3월 뉴욕의 첼시마켓 빌딩을 24억달러에 인수하기도 했다.

▲ 아마존은 최근 2본사를 확정했다. 출처=아마존

현재 뉴욕에 둥지를 튼 스타트업만 1만3000개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음원 업체 스포티파이도 최근 뉴욕 시대를 선언했고 페이스북 등 전통의 기업들도 속속 뉴욕에 사무실을 내거나 확충하고 있다. 위워크와 킥스타터, 엣디 도 모두 뉴욕에서 문을 열었다. 뉴욕이 테크기업의 새로운 수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11월 한국 AI 총괄센터 설립을 시작으로 올해 1월 미국 실리콘밸리, 5월 영국 케임브리지, 캐나다 토론토, 러시아 모스크바에 이어 6번째는 뉴욕에 글로벌 AI 연구센터를 열었다.

뉴욕의 이러한 성과는 자체적인 노력과 외부의 변화가 적절히 맞아 떨어진 결과라는 평가다.

뉴욕은 2001년 닷컴버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뉴욕 시장으로 재임한 마이클 블룸버그는 '도시가 스타트업'이라는 프레임을 걸고 대대적인 생태계 전략에 나선다. 실리콘앨리라는 프레임을 중심으로 파격적인 정책이 연이어 나왔다. 뉴욕시의 각종 행정정보를 기업에 공개했고 대학에서 창업된 스타트업에는 10년간 법인세를 면제해줬다. 맨해튼 루스벨트아일랜드에 문을 연 코넬테크(Cornell Tech)를 적극적으로 유치한 이도 마이클 블룸버그다. 그 뜻은 현 시장인 빌 드블라시오가 이어받아 뉴욕웍스 프로젝트로 결실을 맺었다. 뉴욕웍스 프로젝트는 사이버 보안과 헬스케어 기업을 유치하는 뉴욕시 차원의 지원 정책이다.

뉴욕은 심지어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금융의 허브라는 상징성도 있기에 자본 조달에도 용이한 편이다. 많은 핀테크 기업들이 뉴욕으로 찾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7000개가 넘는 전통의 중소 제조업 기업도 포진했으며 컬럼비아대와 뉴욕대가 근처에 있어 인재 확보에도 유리하다. 하버드와 MIT도 멀지 않다. 뉴욕의 경우 동부 연안에 위치했기 때문에 바다와 큰 강을 끼고 있어 물류 유통에도 강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캐나다 토론토도 각광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나란히 인공지능 연구센터를 설립한 곳이다. 토론토는 연 4만명의 이공계 졸업생이 배출되는 곳이며 벤처캐피털 규모로 보면 북미 기준 4번째다. 정부 차원의 기업 지원도 풍부해 막대한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구 절반 이상이 비 캐나다 출신일 정도로 국제도시의 면모를 가진데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 이민 정책으로 세계의 인재들이 토론토로 몰려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워털루대와 웨스턴대의 아이비 경영대학원 등 캐나다를 대표하는 비즈니스 스쿨이 근처에 즐비한 것도 장점이다.

캐나다 정부는 최근 토론토와 몬트리얼 등의 지역에 주요 인공지능 연구소 협업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왕자 엔비디아가 지난 6월 토론토에 인공지능 연구소를 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알파벳 자회사 사이드워크랩스도 토론토에서 스마트시티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이 외에도 프랑스 파리는 유럽을 대표하는 스타트업, 인공지능 전략 허브로 육성되고 있다. 국내의 네이버 등이 프랑스 파리를 기점으로 콘텐츠 플랫폼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삼성전자도 인공지능 영역에서 파리를 매개로 움직이고 있다. 파리의 스타트업 육성 시설인 스타시옹 에프(F)를 중심으로 반 실리콘밸리 전선이 구축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콘텐츠와 관련된 기업은 미국 LA, 바이오나 헬스케어는 보스턴 등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중국 선전은 제조업의 메카에서 인터넷 플러스 정책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하드웨어 기업들을 속속 유치하고 있다.

▲ 삼성전자도 뉴욕에 인공지능 센터를 설립했다. 출처=삼성전자

"기업하기 좋은 도시 만들자"
한국의 싱크탱크 재단법인 여시재와 중국 칭화대 글로벌지속가능발전연구원은 지난 4일 중국 베이징에서 '2018 신문명 도시와 지속가능발전' 국제 포럼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대도시는 산업문명이 만들었으며 이제는 지속불가능의 핵심 원인"이라면서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문명의 티를 벗어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도시를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다. 홍석현 한반도 평화만들기 이사장은 이를 두고 "세계가 열광하는 문명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도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ICT 기술을 지원하고 기업들을 품어내며 혁신을 창출하는 도시의 기본은 곧 '기업하기 좋은 도시'라는 아젠다에서 출발한다. 혁신이 창출되고 인재들이 모이려면 치밀하고 확실한 인프라 구축에 이어 대대적인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좁게는 기업에 대한 세제혜택과 각종 지원을, 넓게는 비전을 펼칠 수 있는 전략을 담보해주어야 한다. 반 기업 정서에만 매달린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이 노리기에는 난망한 일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새로운 아젠다로 무장한 새로운 도시의 발전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