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쪽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옮겨 주세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퇴근 무렵,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서 회사 근처 순대국밥집으로 향했다. 비 때문인지 가게 안 테이블 대부분이 비었고, 술 손님 몇뿐이었다. 생긴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가게라 팔아주려는 맘에 들렀는데, 웬걸 혼밥러라고 출입구 카운터 뒤편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옮겨 앉으라는 얘기부터 들었다.

그냥 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재킷을 벗어둔 마당에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혼자 온 손님에게 작은 테이블로 안내하는 직원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손님도 없고 국밥 한 그릇 먹는 십여 분,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이 밀려들어 자리가 부족해질 리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가뜩이나 신생 식당이라 직원들이 일이 서툴러서 몇 테이블 되지도 않는 손님들 주문에 허둥거렸다. 기본 찬이며 국과 밥이 나오기까지 예상보다 한참이나 더 걸렸다. 구석에 앉은 필자에게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질 않았다. 공기밥을 추가하기 위해 한참을 수저만 빨며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리번거렸다. 참다못해 홀 전체에 다 들릴 만한 소리로 소리쳤다.

“여기요. 공기밥 하나 더 주세요.”

 

맛있고 친절하다는 소문은 거북이, 불친절하다는 소문은 번개

홀 가운데 테이블에 앉은 필자를 굳이 일으켜 구석 테이블로 안내했을 때와 같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공기밥을 들고 오는 직원 얼굴을 대하는 순간 밥 맛이 확 떨어졌다. 게다가 밥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오래되어 뭉쳐있는 헌 밥이었다. 서비스가 아니라 돈 받는 밥이었다. 절반을 말아서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바로 일어섰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라는 오기가 속에서 올라왔다. 그 후로 국밥집을 지나칠 때면 흘깃 안쪽을 쳐다볼 뿐 발길을 끊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로 붐비는 걸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이런 게 부담스러워 혼밥을 꺼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주위에 많다. 눈치 보며 홀대 당하느니 차라리 라면이나 끓여 먹는 것이 속은 편하다. 아니면 배달 음식을 먹기도 하는데 달랑 한 그릇 시키기가 미안해서 1인분을 추가로 주문해 냉장고에 넣어놓고 먹는다고 한다. 갈수록 혼밥이 늘고 있는 추세라, 영업하는 식당주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한편으론 이해도 된다. 여럿이면 매출에 도움되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마케팅 측면에서 도움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맛집을 선택하는 기준 중의 하나가 식사 때 붐비는 집이다. 아무 정보가 없더라도 길게 늘어선 줄이 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보증수표가 되는 셈이다. 혼밥러들도 잘 안다. 괜히 식당에 민폐되기 싫어서 알아서 행동한다. 하지만 식당도 슬기로운 대처가 필요하다. 사실 맛있다는 소문이 나는 속도보다 불친절하다는 소문이 나는 속도가 몇 배는 빠르다.

또, 이미 친절에 익숙해지고 맛있는 음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더한 감동을 주기란 여간 해선 쉽지 않다. 반면에 사소한 일로 빚어진 불친절과 정성들인 음식에 실수로 들어간 머리카락 한 올이 세상에 알려지는 속도는 번개와 같다.

요즘은 웬만한 시내에는 한 블록에 두어 개씩의 편의점이 들어서 있다. 마트의 대명사인 이마트도 편의점을 지속적으로 늘려가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필자가 출퇴근 때에 매일 또는 하루 걸러 한 번은 꼭 들리는 편의점이 있다. 비슷한 곳이 여러 개 있더라도 계속 한 곳만 고집하는 이유는 필자를 알아주기 때문이다. ‘며칠 만에 오셨네요. 출장이라도 다녀오셨어요?’라는 정도의 인사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아르바이트 직원 고생 끝에 점장의 고생으로 돌아와

아침에 가는 편의점과 퇴근 때 가는 곳이 다른데, 동선이 살짝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구입하는 물건이 다른 이유가 크다. 아침 식사를 삼각김밥과 음료수로 해결하고 저녁에는 주로 담배를 구입한다. 때문에 아침에는 삼각김밥을 전자레인지에 잠깐 데우고 편의점 내 테이블에서 먹고 나오기 때문에 10분 정도 머무른다. 퇴근 때는 1분 정도이지만 맘씨 좋은 아주머니가 언제나 미소 지으며 있는 곳이다.

아침 식사를 주기적으로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아르바이트 직원과 대화가 시작됐다. 직장 생활에 대한 궁금증, 자신이 교통사고가 나서 오랫동안 병원 신세였던 이야기, 취업 준비를 위한 조언 등등 잠깐 동안이지만 의미 있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하소연이 뒷말로 꼭 붙었다. 점장과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근 1년 이상 아르바이트를 해온 것을 보면 심지가 있어 보였는데, 결국 어느 날 아침에는 다른 사람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아침이면 들렀지만 그 뒤로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게 됐다. 그러다 얼마 후엔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엔 제법 연배가 있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연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여는 그분은 여느 아르바이트생들과 달랐다. 매장 앞에 쓰레기도 쌓이지 않게 수시로 치웠고, 피곤할 법한데도 매장 내 여러 곳을 신경 쓰고 다녔다.

그런 몇 개월이 후딱 지나가 버리고 어느 날 아침부턴가는 키가 작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중년 여성이 편의점을 지키고 있었다. 첫 인상부터 피곤이 역력해 보였다. 물건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가서 보니 명찰에 점장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점장이라고 일이 더 능숙한 것은 아니었다. 밤새 편의점을 지키며 피곤과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서인지 카운터 옆에는 먹다 남긴 과자 봉지며 커피나 음료수가 있었다.

그 뒤부터 짧은 아침 식사 시간이면 간혹 듣게 되는 소리가 생겼다. 점장의 한숨 소리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봐도 충분히 짐작이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필자의 짐작이 정확히 맞으리라 장담하지는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편의점으로 가고 싶지만 편의점마다 구비해놓은 음식들이 조금씩 달라서, 그 편의점 음식에 길들여지다 보니 듣기 싫은 한숨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들리게 된다.

언젠가 일명 ‘지라시’라는 것을 손에 넣고 보니 필자의 회사와 관련된 어마어마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지라시에서 주목할 만한 회사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가 실렸다는 것은 지라시의 생리에 대해 아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흘렸다는 결론일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예전에 회사 내 고위직의 비서로 있던 직원이 견디다 못해 퇴직했고, 앙심을 품어 오던 것을 앙갚음한 것이었다.

 

지원자 없는 직원 모집, 결국 회사 전체의 고생

그렇지 않은 회사도 있겠지만 어느 기업이건 고위직 옆에서 일하는 비서 일은 쉽지 않다. 특히나 취향이 유별나기로 소문난 왕회장님이거나 밤낮없이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시중을 들어야 하는 비서진은 더 힘들다. 이들의 생활은 범인이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일 경우가 많다. 차로 이동하는 내내 옆에서 책을 읽어 주어야 하고, 보는 신문이 문틈에 끼어 구겨져 있기라도 하면 큰 일 난다. 해외 출장을 가거나 할 때도 일등석에 앉아 가는 사람을 이코노미석에서 수시로 수발 들어야 한다. 집에서 떠온 귀한 생수를 늘 온수, 냉수, 차로 보온병에 들고 다니며 목이 마를 일 없게 해야 한다.

한 번에 수천만원어치 옷들을 쇼핑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일반인이 다니는 식당은 근처에도 가지 않으며, 자신이 쓰는 변기에 타인의 피부가 스치기만 해도 소독해야 직성이 풀린다. 배가 고파서 좋아하는 김치찌개 된장찌개에 밥이 먹고 싶어도 샌드위치나 과일을 대령해야 하고, 한밤중에 급한 볼일이 생기면 아파트 입구에 있는 경비 초소에 가서 볼일을 보고 와야 했단다.

근무하면서 당한 이런 원망을 담아 쓴 지라시에 그룹 내 많은 임원들이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기사로 연결이 되기에는 쉽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기사화를 위해서는 필자에게 확인이 필요했기에 걱정 많은 연배 높은 임원들을 애써 달랬다.

그래서겠지만 비서들은 수시로 바뀌었다. 짧으면 몇 주 길어봐야 6개월 정도였다. 아무리 심성 고운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런 홀대를 받으며 버틴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기에 1년을 넘게 일해온 어느 비서에게는 너무나 감지덕지 했다. 볼 때마다 ‘버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그 지라시의 내용은 취업준비생들이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카페의 글이었다. 선배가 후배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게시판에 올린 글이 외부로 돌아다니게 된 것이었다. 그 카페는 국내 유명한 비서학과 출신이거나 비서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입된 곳이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비서가 쉽게 채용되었지만 나중에는 채용 공고를 아무리 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원자가 없는 회사, 사람을 홀대한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발길이 끊어진 회사가 의외로 꽤 있다. 혼자 밥 먹으러 온 사람을 매출에 별 도움도 안 되고 자리만 차지하는 사람 취급한다면 그 식당은 대박의 꿈을 접는 것이 낫다. 밤을 지새워 편의점을 지킨 아르바이트생에게 온갖 간섭을 하다 보면 결국엔 점장이 그 고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을 홀대하다 보면, 자신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근무하는 수백 수천 명의 직원이 고생을 하게 된다. 이 정도 상식은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