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렉셀은 위험이 높지만 고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들과, 자금 조달을 원하지만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매년 콘퍼런스를 열었다. 1970년대 말에 시작된 콘퍼런스는 약 50명이 참석하는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고, 캘리포니아의 비버리 힐튼 호텔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정크본드 시장이 팽창하면서 이 콘퍼런스는 곧 월가의 관심을 끌었다. 1984년 컨벤션에는 800명 정도가 참석하면서 주요 좌석에는 웬만큼 힘쓰는 사람도 앉기 어려울 정도의 유명한 모임으로 발전했다. 금요일 밤 만찬에 1500명 정도가 참석했고, 유명한 프랭크 시나트라가 깜짝 등장해 45분간 메들리로 노래를 불렀다.

콘퍼런스는 ‘투자 엑스포’ 또는 ‘투자 갈라(Investment Gala)’와 같은 성격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 컨벤션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밀켄과 드렉셀이 제공하는 정크본드 비즈니스를 통해서 얼마든지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컨벤션에 LBO(Leverage Buy Out, 보통 ‘레버리지 차입 매수’또는 ‘레버리지 차익거래’라고 부른다. 기업을 인수할 때 많은 비용이 드는데, 대부분의 인수 비용을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하여 투자은행 등을 통한 대출 또는 채권 발행 방식으로 조달한다. 차입 비율이 자신이 가진 돈보다 월등하게 높은 경우를 보통 LBO라고 한다. 밀켄은 LBO를 원하는 기업 또는 기업사냥꾼들에게 정크본드 발행을 통해 엄청난 돈을 지원해 주었다)나 적대적 기업 인수를 노리는 기업사냥꾼(Corporate Raiders)들이 많이 참석하게 된 것이다.

1988년 봄, 코니 브룩이 쓴 <약탈자들의 무도회(Predator’s Ball)>가 출간됐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하듯이 브룩은 드렉셀과 밀켄을 금융의 사악한 무리, 기업사냥꾼 그리고 차익거래자들의 조종자로 묘사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브룩은 드렉셀이 주최하는 이 컨벤션을 “약탈자들의 무도회”로 비난했다. 그녀가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이후 “약탈자들의 무도회”는 기업사냥꾼과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는 투자자들 사이의 미팅을 가리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됐다. 그녀의 이러한 표현은 다소 지나친 면이 있지만, 컨벤션은 1984년 모임부터 그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드렉셀의 기업 금융 부문 책임자인 프레드 조지프(그는 후일 드렉셀의 CEO가 된다)는 1984년 컨벤션에서 회사의 새로운 전략을 야심차게 발표했다.

“우리는 적대적 기업 인수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여러 방법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조지프와 밀켄은 정크본드를 발행해 M&A 자금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었다.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게 됐습니다. 누구라도 대형 회사를 인수할 수 있게 됐습니다.” 조지프의 이러한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밀켄과 드렉셀을 중심으로 한 정크본드 시장은 강력한 수익률을 근거로 무제한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며, 적대적으로 기업을 인수하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제 미국 기업계의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시장이 열린 것이다. 이후 드렉셀과 밀켄은 적대적 기업매수에 대한 찬반 여론과 함께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코니 부룩은 드렉셀이 주최한 콘퍼런스에 매춘부까지 동원됐다고 비난했다. 부룩의 지적처럼 그런 부분은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1984년 드렉셀 컨벤션이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날은 1980년대 “탐욕의 시대”로 질주하기 위한 고속도로의 톨게이트 문이 열린 날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1984년 콘퍼런스에 참여한 당사자들조차 알지 못했다. 앞으로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돈을 벌게 될 것인지를.

그날 밤, 콘퍼런스에 참여한 미국의 핵심 기업사냥꾼들은 호텔 옆 방갈로 8번지에 모여 드렉셀의 인사들과 조용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안에 미국 기업계에 지진이 발생할 터였다. 부니 피킨스는 유노칼(Unocal)을, 넬슨 펠츠는 내셔널 캔(National Can)을, 제임스 골드스미스 경은 크라운 젤러바크(Crown Zellerbach)를, 윌리암 팔레이는 노스웨스트 인더스트리를, 스테판 윈은 힐튼 호텔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모든 실탄을 드렉셀이 제공하기로 했다. 실로 혁명 전야였다. 무서운 혁명의 쓰나미가 곧 월가와 미국 주요 기업들에 들이닥칠 예정이었다(브룩은 이러한 공격을 정상적인 미국 기업들의 경영에 대혼란을 야기하는 테러로 평가했다).

드렉셀의 콘퍼런스에는 후발 주자로 정크본드 비즈니스에 뛰어들은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들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거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많은 잠재적 고객들을 콘퍼런스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많은 대형 투자은행이 독자적인 콘퍼런스를 개최하며, 적대적 기업 매수와 LBO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골드만삭스는 대형 백화점 매시를 인수하기 위한 40억달러의 LBO를 성사시켰고, 모건스탠리는 레블론 인수 작전에 드렉셀과 공동으로 진행하면서 기존의 대형 투자은행들에게 충격을 주었다(지금까지 드렉셀이 지원하는 적대적 기업 매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는데, 모건스탠리가 드렉셀과 손을 잡고 이러한 전쟁에 직접 뛰어 들었기 때문이다). 메릴린치와 리먼은 더욱 공격적으로 움직였고, 퍼스트 보스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들이 고수익 채권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선두 주자인 드렉셀을 따라 잡기 어려웠다. LBO와 적대적 기업 매수를 계획하는 기업사냥꾼들은 밀켄과 드렉셀에 자금 지원을 부탁했다. 드렉셀은 이들에게 ‘의향서(Highly Confident Letter)’를 발행해 주었다. 이 문서는 법적인 의무는 없지만 밀켄의 명성과 능력을 고려할 때 매우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밀켄과 드렉셀은 자신들의 든든한 투자자들을 동원해 무제한의 LBO 실탄을 지원하면서 월스트리트 M&A 시장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드렉셀과 밀켄의 성공과 질주는 1986년 가을에 절정에 달했다. 드렉셀은 정크본드 시장을 거의 독식하고 있었다. 1986년 말, 드렉셀의 수익은 40억달러에 달했고, 이는 당시 최고의 투자은행인 샐러먼 브라더스와 골드만삭스의 수익을 제치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언론에서 밀켄의 성공을 추겨 세웠다. <포브스>는 이미 1984년에 커버스토리로 밀켄을 다루면서 “한 사람에 의한 혁명(A One-Man Revolution)”이라는 제목으로 밀켄을 영웅으로 다룬 적이 있었다. <비즈니스위크>는 J.P. 모건에 비유하면서 정크본드 혁명을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고 썼다.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스>는 밀켄을 가리켜 “위대한 밀켄”이라고 했다. 심지어 진지한 언론인 <이코노미스트>까지 나서 정크본드를 통한 기업 인수 활동은 미국 기업의 비즈니스를 보다 경쟁력 있게 작동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으며, 보다 훌륭한 경영진을 통해 효율적인 경영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밀켄과 드렉셀의 놀라운 성공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 밀켄은 수십억달러의 정크본드를 팔면서 월가의 귀족들을 열 받게 하는 행동을 했다. 월가에서 자금 조달을 할 경우 투자은행들 중 하나가 대표주관회사 역할을 맡고, 여러 투자은행들을 신디케이트(Syndicate)를 구성해서 위험과 수익을 나누어 갖는 것이 관례였고 에티켓이었다. 그런데 밀켄과 드렉셀은 이런 방식으로 채권을 인수한 적이 거의 없었고 혼자서 수익을 다 먹어 버렸다. 또한 뒤늦게 정크본드 시장에 뛰어든 기존 투자은행들에게 밀켄과 드렉셀은 양보할 마음도 전혀 없었다. 드렉셀과 밀켄은 시장 점유물 100%를 목표로 했고, 오히려 다른 투자은행들이 진행하는 딜을 깨려고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드렉셀과 밀켄의 행동은 오만이었고, 이러한 행동은 기존 투자은행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또한 밀켄은 본의 아니게 미국의 <포춘> 500대 기업의 이사들도 모두 적으로 만들었다. 밀켄이 정크본드의 발행을 통해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처럼 밀켄과 드렉셀의 거침없는 성공과 함께 새로운 적대 세력들의 분노 역시 숨죽이며 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