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업의 발전사에는 늘 탁월한 리더가 있었고, 그들은 탁월한 리더이기보다는 메시아에 가까웠다. 그들의 결정에 의해 수십 수백명의 목숨 줄이 왔다 갔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리더들에게 기댈 수밖에, 혹은 기대고 싶었다.

그들은 늘 탁월함을 통해 모두를 이끄는 데 집중했다. 개인의 욕망의 표현이든 기존에 걸어왔던 길이 계속 성공가도를 달리든 간에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리더 자신 혹은 조직의 성공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기 위한 움직임으로 채우는 것에 바빴다.

처음에 시장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몇몇의 튀는 리더들은 자신들만의 입지를 시장에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장을 창조하고 그 시장 속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에서 직원 혹은 고객의 소리든지 무엇이든 관계없었다.

그저 높은 성과만 내면 충분했다. 자신의 성공가도를 위해서, 기존에 걸었던 길을 계속 걷기 위해서 자신들이 했던 방법을 고도화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시장의 요구는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았기에 굳이 더 큰 모험을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과거보다 많은 변화로 인해 세상은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이미 그 세상부터 멀어진 리더는 과거의 방법을 고수했다. 물론 여전히 그 방법은 통한다. 서서히 변하는 그 디테일은 오로지 고객과 인접한 담당자만이 알아차릴 뿐이다.

아무리 고객의 소리를 대신해서 전달해주어도, 들을 수도, 들을 만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소 귀에 경 읽기에 가깝다. 결국 고객을 향해 말하는 일을 대신하는 담당자는 극단의 선택에 놓인다. ‘고객을 만족시킬 것인가 VS 리더를 만족시킬 것인가.’

많은 담당자들은 달성하기 어려운 전자보다는 쉽게 처리 가능한 후자를 선택하기에 바빴다. 물론 고객의 소리를 대신해 리더에게 들려줘봤다. “고객이 바라는 것은 이것입니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리더는 듣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 최초 기업을 만들고, 우리 기업을 이 자리까지 이끈 것은 자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조를 유지하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또한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식을 대신해줄 수 있는 직원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준다.

당연히 리더를 따라서 리더가 바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직원들은 리더의 성공 방향에 대한 머리에 의한 공감(Sympathy)은 할 수 있어도, 마음에 의한 공감(Empathy)은 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자신의 월급 루팡들로 인해, 기존에 하던 일이 있기에 계속해서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기업과 고객 사이의 소통이 중심이 되어야 할 커뮤니케이션 방향은 자연스럽게 실무자와 리더의 소통으로 자리를 이동한다. 당연히 고객보다는 리더의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이게 되고, 그(녀)의 이야기가 곧 조직 내에서 법이 된다.

그 전에도 비슷했지만, 일종의 처벌 수위와 디테일이 강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꼭 이렇게 해야 한다” 수준이었다면, 이후에는 “꼭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에 가깝다. 곧 기업의 목표는 리더 그리고 리더가 바라는 모든 것이 된다.

이런 조직에서 대부분 많은 이들이 낙심과 낙담을 거듭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조직과 절충하고, 그 절충하는 경험 속에서 진짜 일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조직에서는 절충이 없다. 그저 리더가 바라는 것을 실제로 옮기면 그걸로 자신의 공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결과까지 좋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심하면 그 결과의 책임은 리더가 아니라 담당자 자신이 져야 한다. 여기서 리더에게 배신감이 드는 것이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모든 책임은 내가 떠안아야 하는가.”

이건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네 조직 속 우리들 대부분이 겪는 리스크 중에 하나다. 큰 성공을 거두었던 기업일수록 대부분 이 논리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 큰 성공 뒤에는 또 다른 성공이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기존 성공에 의해 발목을 잡혀,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공에 취해 안일한 선택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누지 않고 누군가 책임을 지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의 목표가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된다. 그 성공을 만든 것은 리더의 몫이라면, 그 실패까지도 리더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함께 일하는 이들과 무거운 짐을 나눠서 드는 과정을 통해 비즈니스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 책임 여부 및 무게와 관계없이 리더의 손과 발에 국한된 역할만을 강조하기에,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질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에 깨어 있는 이들이 몇몇의 대우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직을 나오는 선택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리더 스스로 그 성공 자체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브랜드가 이전 브랜드의 성공에 힘입어 더 큰 성공을 기대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도, 영화의 본편보다 속편의 흥행이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전 성공 논법을 그대로 따랐기에, 그와 유사한 성공을 할 것이라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과분한 시대가 되었다. 지금 시대가 불확실성이 과거에 비해 수백배 높아졌는데 어떻게 그런 것을 바랄 수 있을까 말이다. 신이 아닌 이상에야 100%에 가까운 통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과거의 GE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도, 애플과 구글 등도 실패를 인정하고, 그 실패로부터 배운 것을 기준으로 더 큰 성공을 위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리더가 앞장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성공이 결코 내가 가진 힘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다. 통제 가능하고, 전체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바보가 된다. 이미 그건 순간에 불과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도 시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부정할 수 없다면, 최소한 겸손하게나마 그 일을 받아들여서 그 일이 리더 자신이 아닌 조직이 가진 역량에 의한 것이라고 최소한 누군가의 ‘탓’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직원들을 바라보는 리더의 마음가짐이라도 건강할 테니 말이다.

결국 리더의 열려있는 생각이 얼마나 기업의 방향뿐 아니라, 명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리더의 오픈 마인드로 더 많은 역량을 가지고 있거나, 성장가능성이 있는 직원들의 미래에까지도 긍정 혹은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알았으면 한다.

고객의 소리를 리더에게 들려주고, 그 생각과 리더의 생각이 같은지 견주기에 바빴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조직 시스템을 리더에 맞추어 변형하고, 그로 인해 고객에게 있어 절대자가 되는 것을 바랐던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물론 여전히 통하는 영역도 있다. 다만 이미 그런 산업에서조차 크고 작은 변화를 통해 이전의 크고 작은 성공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들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리더가 직감해야 한다. 혹은 리더가 직감할 수 있도록 고객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리더가 고객 소리에 공감하지 못하면 일은 늘 멈췄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결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조직의 시스템은 극심한 변화 속에서도 성장 가능한 방향을 찾아서 진화해야 하고, 그 진화는 오로지 고객의 소리에 대해 깊이 이해한 리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앞날을 결정하는 이가 리더이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면, 리더도 직원들 혹은 고객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만한 채널을 늘 열어두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의 목표가 자신의 성공과 안위만이 아니라는 것을 직원을 포함, 고객에게 말할 수 있다.

어느 누가 리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직원과 고객을 이용만 하려는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해줄 것인가, 지금 시대에는 결코 고객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가장 첫 번째 모습이다.

지금 우리 조직, 리더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이 자주 보인다면 단속이 필요하다. “나는 성공에 취해 있고, 그 성공으로 인해 리더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힐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