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문재인 정부와 재계는 정권 초기 불편한 관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선실세 논란을 겪으며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국회 청문회에 서는 등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재계와 거리를 두며 조심스러운 첫 발을 내딛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문재인 정부가 국내 대기업을 오로지 적폐세력으로만 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문재인 정부와 재계의 ‘부드러운 무드’

분위기는 지난해 말을 중심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LG를 시작으로 1월 현대차, 3월 SK, 6월 신세계를 방문하며 구본준 부회장과 정의선 부회장, 최태원 회장, 정용진 부회장을 연이어 만나 현장 스킨십을 강조했다.

김 부총리는 오너들을 만난 자리에서 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맞춰 국내 경제 활성화에 나서는 한편, 일자리 창출과 상생협력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기업들도 화답했다. LG그룹이 올해 19조원을 투자하고 1만명 고용을 약속한 것과 현대차가 5년간 4만5000명을 고용하겠다고 발표한 시점은 모두 김 부총리 방문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판로지원을 강조했으며 SK하이닉스의 경기도 이천 공장 신축도 김 부총리의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 인도 노이다 스마트폰 공장 준공식에서 이 부회장을 만나 인도에서 거둔 삼성의 성과를 거론하는 한편,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력을 당부했다.

삼성전자도 움직였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130개에 이르는 반도체 협력사에 총 200억원 규모의 격려금을 제공했다. 생산성 격려금과 안전 인센티브 명목이며 생산성 격려금은 2010년부터, 안전 인센티브는 2013년부터 지급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에도 반도체 협력사에 상반기 200억원, 하반기 300억원을 격려금 명목으로 제공했다. 일종의 상생협력이다. 또 국내 중소기업, 중견기업에 스마트팩토리 지원을 목표로 5년간 총 600억원을 제공하는 방안도 발표했다.

김 부총리의 삼성 방문도 이어졌다. 김 부총리는 8월6일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해 이 부회장을 만나 “기업의 목소리를 듣고 정부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색하고 고민해왔다”면서 “우리 경제는 굉장히 중요한 전환기를 맞았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기다. 대표주자인 삼성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직후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와 재계의 부드러운 기류는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도 재연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비롯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최정우 포스코 회장, 신한용 개성공단기업 협회장, 이동걸 한국산업은행 총재, 이재웅 쏘카 대표 등이 문 대통령과 함께 평양에 갔다.

정부와 재계의 잦은 스킨십에 일각에서는 우려의 반응도 나오고 있다. 특히 이 부회장은 아직 집행유예 상태기 때문에 국가적 행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면죄부로 해석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9월16일 청와대 브리핑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과 평양 방문에 대해 "재판은 재판대로 엄격히 진행되는 일"이라고 선을 그은 이유다.

일자리 창출...합동작전 계속?

SK하이닉스가 4일 청주 M15 준공식을 연 가운데, 이 자리에도 문 대통령이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외환위기에 탄생한 하이닉스는 이제 2만5000명의 직원이 함께하는 세계 3대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섰으며, 지난해엔 매출액이 30조원에 이르렀다”면서 “낸드플래시는 빅데이터의 핵심이다. 정부도 SK하이닉스의 발전과 성장을 응원하며 적극 지원하겠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에서 새로운 성장과 기업의 역사를 써 내려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준공식 이후 현장에서 열린 제8차 일자리위원회 회의를 통해 제조업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기업의 투자 촉진과 활력 회복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민간 부분의 일자리 창출 방안은 고용위기를 극복하는 돌파구로서 특별히 중요하다”면서 “미래차와 반도체·디스플레이, 스마트 가전, 에너지 신산업, 바이오 헬스 등 5개 분야에 대해 민간이 미래성장 동력을 위해 중점 추진하고자 하는 140여개 프로젝트를 정리했으며 총 125조원의 투자를 통해 9만2000여 좋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재계의 교집합이 일자리 창출, 경제 활성화에 방점이 찍혔다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현 정부의 경제 정책이 최저임금, 부동산 논란을 거치며 공격받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결국 민간 중심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를 타진하는 한편, 정부가 규제혁신 등 측면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문 대통령은 “정부는 맞춤형 서포트 타워 역할을 해야할 것”이라면서 “민간의 프로젝트를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