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에서는 동교동 김대중 대통령의 주거지 터를 살펴보겠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세교리계(細橋里契) 지역이었다. 세교는 작은 다리라는 뜻이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동세교리(東細橋里)라고 했다. 1936년 동교정(東橋町)으로 바뀌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동교동(東橋洞)으로 바뀌었다.

마포구 동교동이라는 지역의 이름은 한자로 東橋洞, 즉 동쪽의 다리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동쪽 잔다리 또는 윗잔다리는 한강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작은 다리가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이 동은 동서 두 군데 있던 것 중 동쪽의 잔다리에서 유래했다. 현재 서쪽은 서교동으로 불리고 있다. 신촌전화국 부근에는 강성샘이라는 웅덩이가 있었다. 아기의 태를 이곳에 버리면 무병장수한다는 소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태를 버린 곳인데, 한강과 통했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14대 김영삼 대통령과 15대 김대중 대통령은 영원한 라이벌로 불렸는데 지역에서조차도 한강을 기준으로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김영삼 대통령은 한강대교 기준으로 800m에 위치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서강대교를 기준으로 1.7㎞에 위치했다. 약 900m의 차이가 있지만 한강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이 정도 거리에 대치하며 거주했다는 것은 라이벌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사대문 안에서 작은 다리의 기운을 받은 터에, 김영삼 대통령은 남쪽으로 한강과 조금 더 가깝고 약간 더 높은 곳에 있으며, 서쪽으로 용마산의 1.9㎞의 기운을 이어 받았고 김대중 대통령은 같은 서쪽으로 성산의 기운을 받았으며 거리 또한 1.6㎞로 작은 차이로 서로 비슷한 기운을 이어 받았다.

즉 한강에서 비슷한 거리에 주거지가 있으며 남과 북으로 대치하고 있고, 같이 서쪽으로 비슷한 거리의 산으로부터 위치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곳에 62년 3월에 전입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69년에 주거지를 옮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간은 약 7년의 차이가 나지만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전입 전 신촌에 거주한 것을 보면 이렇게도 절묘하게 대치되는 터에 위치했던 것이 너무나 놀랍다.

동교동은 위로 연세대학교가 가까이 있고 동쪽으로 비슷한 거리로 서강대가 있다. 상도동은 옆에 중앙대학교가 있어 동쪽으로 위치한 터의 기운도 닮아있다.

학의 기운과 터가 동교동이 더 강한데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은 책을 많이 읽었고 공부를 많이 하고 또 좋아했다.

동교동은 넓고 시원한 기운보다는 아기자기하고 기차역이 있어 낭만이 넘쳤고 지금은 개발되어 예술의 거리, 젊음의 거리 등 많은 문화인의 거리로 발달했다.

필자는 동교동이라는 터가 상도동과 비교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작은 다리’라는 뜻을 가진 동교동에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속담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누구보다 빛났고 고난 속에서 역경을 이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