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SK그룹이 19일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현지 기업인 마산그룹 지주회사 지분 9.5%를 4억7000만달러에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업은 앞으로 베트남 시장에서 신규사업 발굴과 전략적 인수합병에 임하며 호흡을 맞추기로 했다.

마산그룹은 지난해 약 16억60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현지 대표 기업이다. 식음료, 축산, 광물, 금융업 등 베트남 경제와 함께 고성장 중인 산업을 중심으로 사업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종합 식음료 분야 1위기업으로서 각종 소스, 라면, 커피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시장 1, 2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사료사업에서도 베트남 최초 축산 밸류체인을 구축할 정도로 의욕적이다. 첨단산업인 반도체, 특수강에 쓰이는 원료인 텅스텐과 형석 등 광물 분야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 민영 1위 은행을 보유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마산그룹은 투명한 경영환경과 지배구조도 가지고 있다. 싱가포르의 GIC, 글로벌 선도 PE(사모펀드)인 KKR 등도 현재 마산그룹 지주사의 주요 주주로 참여하는 이유다.

SK의 마산그룹 지분 확보를 두고 업계에서는 SK의 글로벌 전략과 최태원 회장의 광폭행보에 집중하고 있다.

최태원 SK회장은 지난 2013년 1월 조세포탈,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후 2015년 8월15일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최 회장은 당시 출소 직후 기자들과 만나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며 "국민께 사랑받는 SK 기업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최 회장이 구속됐을 당시 SK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제왕적인 총수 체제를 타파하겠다면 내세운 '따로 또 같이 3.0'이 기대이하의 성과를 보여주는가 하면 당시 수펙스추구협의회도 성장보다는 당장의 안정을 택하는 방식으로 소극적인 행보만 보여줬기 때문이다.

글로벌 전략이 줄줄이 무너진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에 제2의 SK를 건설하겠다던 차이나 인사이더 전략의 퇴보다. 최 회장이 SK의 전면에 나서던 지난 2013년, SK종합화학이 중국 최대 국영 석유기관인 시노펙과 우한 에틸렌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프로젝트에 성공시켰으나 최 회장이 수감된 후 차이나 인사이더 전략은 사실상 소득없이 끝났다. 2014년 시진핑 국가 주석이 방한했을 당시가 SK의 차이나 인사이더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말이 나왔으나, 최 회장이 없는 SK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굵직굵직한 인수합병도 난항이었다. SK는 최 회장이 부재한 상태에서 SK E&S가 STX에너지를, SK텔레콤이 국내 보안업체 2위 사업자인 ADT캡스 인수합병을 추진했으나 모두 고배를 마셨다. SK이노베이션의 호주 유류공급업체 UP 인수건도 실패했고 SK네트웍스의 KT렌탈 인수까지 무위에 그쳤다. 시내면세점 선정을 둔 재계 '자존심 싸움'에서는 제대로 명함도 내놓지 못하고 탈락의 쓴맛을 봤다.

최 회장이 돌아오자 거짓말같이 글로벌 전략과 인수합병 로드맵이 탄탄해졌다. 최 회장은 경영복귀 후 SK하이닉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등 광폭행보에 나섰고, 전 조직이 전사적인 행보에 돌입해 재계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 회장이 2016년 6월30일 경기도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SK그룹 확대경영회의에서 "기업간 전쟁을 전쟁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면서 "기업은 이제 서든데스(Sudden Death)가 될 것"이라고 일갈한 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이후 국정농단 사태와 이혼 문제가 불거지며 최 회장의 대외행보 스텝이 살짝 꼬이기는 했으나, 2017년 검찰이 최 회장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다시 광폭행보가 시작됐다. 한미일 연합의 도시바 인수 성공을 주도하는 한편 최근에는 ADT캡스 인수까지 마무리했다. 지지부진했던 차이나 인사이더 전략도 되살아났다.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는 평가다. 최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공유경제에 입각한 오픈소스 모델로 SK의 정체성을 새롭게 다지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글로벌 전략은 지난해 말부터 더욱 구체적인 윤곽을 보이기 시작했다. SK는 해외사업 강화를 위해 지난해부터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현지에서 독자적으로 사업영위가 가능한 유망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3대 중점지역 중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과 말레이시아를 핵심 거점국가로 정하여 다양한 사업기회를 탐색했다는 설명이다.

▲ 최태원 회장이 베트남 하노이시 총리 공관에서 응웬 쑤언 푹(Nguyen Xuan Phuc)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출처=SK

흥미로운 대목은 동남아시아 거점 확보다. SK는 말레이시아와 함께 베트남을 중심으로 '동남아 夢'을 위한 정지작업에 돌입했다. 최 회장이 지난해 11월20일 싱가포르와 베트남을 연이어 방문해 현지 정관계와 재계, 학계, 벤처사업가, 투자전문가 등 다양한 그룹의 인사들과 에너지·정보통신(ICT) 등 분야의 상호 협력방안을 논의한 후 23일 베트남 하노이시 총리 공관에서 응웬 쑤언 푹(Nguyen Xuan Phuc) 총리와 만나 1시간 30분 가량 면담한 사실이 단적인 사례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SK의 베트남 사업 현황 등을 설명하고  “베트남의 미래 성장전략과 연계해 베트남과 SK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협력 기반을 만들어 나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응웬 총리도 화답했다. 그는 “베트남의 중장기 발전을 위해 민간기업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어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계속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면서  “SK가 국영기업 민영화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답했다.

응웬 총리는 또 “반도체와 스마트시티, 철도 및 고속도로 등 인프라 분야 투자와 스타트업 등 청년창업과 베트남 미래 인재 양성에 SK 지원이 있기를 희망한다면서 “향후 SK의 투자와 지원에 대해서는 유관부서가 적극 협조토록 하겠으며 본인도 직접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은 응웬 찌 중(Nguyen Chi Dung) 기획투자부 장관을 만나 총리 면담 내용을 공유하고 구체적인 후속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 회장은 사흘간 베트남 민간기업 대표와 대학총장 등 경제, 사회분야 전문가들과도 접촉해 현지 시장과 산업 수요를 파악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 최대 소비재 기업인 마산(Masan)그룹 응웬 당 꽝(Nguyen Dang Quang) 회장과 ICT기업인 FPT그룹의 쯔엉 자 빙(Truong Gia Binh) 회장을 연이어 만나 중장기 사업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응웬 낌 썬(Nguyen Kim Son) 하노이 국립대 총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베트남 거시 경제 전망과 베트남 시장 진출에 필요한 조언 등을 경청했다는 후문이다.

올해 1월 SK가 비서실을 개편하며 비서실장에 김유석 SK에너지 전략본부장(전무)을 임명한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김 비서실장은 외교관 출신이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지냈으며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 석유회사 BP 등에서 일했으며 2009년 SK에 합류했다. 이후 SK차이나와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등을 두루 거쳤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수준을 넘어 현지의 정무적 판단능력도 갖춘 인재라는 평가다. SK의 글로벌 전략 본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 최 회장이 깜수와이 깨오달라봉 라오스 대사를 만나고 있다. 출처=SK

SK의 글로벌 전략이 최 회장이라는 콘트롤 타워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는 수준까지 왔지만, 아직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7월 벌어진 라오스댐 붕괴 사건처럼 한 순간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SK는 라오스 재난의 신속한 구조를 위해 1000만달러를 지원하는 한편 현지 구조작업에 집중했으며 최 회장이 직접 깜수와이 깨오달라봉 라오스 대사를 만나는 등 공을 들였으나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은 상당히 뼈 아프다는 말이 나온다. 동남아 몽을 본격적으로 만개하려는 SK의 유일한 리스크다.